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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May 02. 2022

세기의 책, '철학' 편 - 사르트르, <존재와 무>

타인은 지옥

.. 사실상 나타나는 것은 다만 대상의 ‘한 양상’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 대상은 완전히 이 양상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이 양상 밖에 있다. 그것이 이 양상 속에 나타난다는 점에서는 이 대상은 완전히 이 양상 속에 있다. 즉, 그 대상은 그 자체로는 이 나타남의 구조로서 자신을 보여 주는 것이고, 이 나타남의 구조가 곧 그 연쇄의 원리이다. 또 이 대상은 완전히 이 양상 밖에 있다. 왜냐하면 그 연쇄 자체는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나타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밖은 다시 안과 대립하고, ‘나타나지 않는 존재’로 나타남과 대립하게 된다. ... -p18


  크게 보면 이 주제다. 우리는 자신의 목적성으로 대상을 바라본다. 이를테면 소설 <구토>에서 각성의 단서였던, 로캉탱이 물수제비를 하려고 집어든 조약돌. 그것은 그 자신의 존재로 놓여있는 것이지, 로캉탱의 목적에 종속하는 존재는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조약돌’이라는 언어 자체가 그렇다는 것.


  호랑이와 사자는, 저 자신이 고양이과로 묶인다는 사실을 알까? 그런 분류는 그들 자신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방식은 아니잖아. 호랑이는 그저 호랑이로서의 존재인 거고, 사자는 사자로서의 존재인 거지. 그 ‘호랑이’와 ‘사자’라는 단어 자체도 그들 자신보다는, 그렇게 이름붙인 인간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


  “모든 사물들은 이름이 붙여지자마자 이미 그 이전의 것과는 완전히 똑같은 것이 아니며, 그 순결성을 상실한다.”


  사르트르의 이 어록은, 동양철학에서는 <도덕경>의 첫 챕터에 등장하는 ‘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에 해당하고, 정신분석에서는 시니피앙과 랑그가 무의식에 닿아 있다는 설명으로까지 발전한다.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그 사람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를 바라보는 타인의 관점인 거지. 그를 내 관점대로 사물화시켜 바라보는 것. 그래서 간혹 그가 ‘그런 사람일 줄은 몰랐다’고 느끼는 순간에 놀라는 거고... 그 사람 역시 여간해서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세상이 바라보는 관점대로 드러내는 페르소나가 대신할 뿐이고...


  그러다가도 각자의 욕심 앞에서 그 존재가 드러나기도 하잖아. 서로가 보아온 서로의 이미지대로 흘러가지 않는 시간, 이때부터 ‘타인은 지옥’인 거지. 그러나 그 모습이 과연 그의 존재를 드러낸 것인가, 아니면 그 또한 그저 나의 관점으로 점철된 내 존재론적 입장인 것인가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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