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신앙, 샤머니즘
... 이처럼 교리 신학에서 오는 관념적 요청과 실제적 종교 활동에서의 구체적 요청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은 동서양을 통틀어 결코 희귀한 일이 아니다. 도교는 무당의 푸닥거리를 비롯한 여러 민간신앙이나 신선사상 등을 중층적으로 흡수하면서 점점 교리를 형성해 왔다. 그러면서 심오한 철학과 많은 신상(神像)을 포함한 풍부한 의례 체계를 갖춘 불교와도 대항해야 했다. ... - <도교백과>, 파라아카데미, p114 -
... 점술이나 주부(呪符:주문과 부적), 연단(煉丹), 게다가 민간의 다양한 신앙은 유교를 세운 사대부 관료들의 교화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는 변함없이 환영받고 소멸하기는커녕 점점 더 번영해갈 뿐이었다. 게다가 유가적 이념으로부터 배격되면 다다르게 되는 곳, 도교에 그 지지를 구했다. ... - 같은 책, p145 -
한(漢)대에는 동중서(董仲舒)가 주도한 기우가 유명하다. 동중서라는 인물은 당시에 저명한 유자(儒者)였는데, 청(淸)대 말의 장병린(章炳麟)이 그를 무사(巫師), 곧 샤먼이었다고 간주할 만큼 술수를 잘 쓴 인물이었다. ... - 같은 책, p290 -
사극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도교의 흔적이 부적과 저주 인형이 아닐까? 그런데 이것들의 기원이 도교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민간신앙을 도교가 끌어안은 것. 그렇다 보니 기원이 잘 안 찾아진다. 좀 더 심도 있는 자료들을 찾아야 하는 건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읽은 책들엔 그냥 이런 설명들이 전부.
조선이 유학을 국교로 삼아도, 왕실에서도 여전히 불교를 믿는 분위기는 잔존했고, 민초들도 여전히 불교에 의존하는 풍토를 강제로 교화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글 창제 이후 불교에 관한 서적들도 간행이 되었던 거고...
비슷한 맥락에서 도교의 성립과정에서도, 민간신앙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거야. 교단이 성립되면서 도가의 현학으로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지만, 민중에게로의 낮은 포교 방식을 택했던 불교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불교와의 경계를 지우면서 열린 체계의 복합체적 성격을 띠게 된다. 그래서 가뜩이나 많은 신들이 있는데, 각자의 바람을 담은 각자의 신도 인정하기에, 도교의 신들은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다.
중국 민족을 한(漢)족이라 하고, 중국어를 漢語라고도 하는데, 이는 한나라 때 거의 모든 체계가 정비된 연유에서이다. 동중서는, 유학을 국교로서의 정치이념으로 정비한 인물이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타락을 마르크스에게 따져 물을 수 없듯,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며 질타했던 유학의 보수성을 공자에게 전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동중서도 어느 정도의 사면적 풍토는 받아들였다는 이야기. 종교도 그런 면이 있지만, 지배담론이 공증하는 것들은 예법이 되고, 그 나머지 이단으로 몰리기 마련. 그러나 도교를 이단으로 배제하기에는 그 지지 기반이 고대로부터 이어온 시간이었다는 거.
따지고 보면 제사 때 쓰는 지방도 부적의 한 종류지. 부적이란 것도 그것을 제작하는 과정 자체가 절실함을 담은 기도의 시간이기도 한 거니까. 제목은 기억이 안 나는데, 진중권 교수의 책에서 읽은 내용. 그 패러다임을 공유하고 있던 시대에는 저주의 행위가 실제로 효력이 있었단다. 저주의 대상이, 나를 향한 저주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생리적 영향을 받았다는 거야. 결국 프로이트도 그 이야기를 하는 거지만, 라캉이 언어를 매개한 상징적 체계가 무의식에까지 차 있다고 말하는 거고... 기적도 저주도 그것을 믿는 자에게, 이것이 종교의 힘이지 않을까? 그걸 악용해 온 역사이며, 지금도 어딘가에서 현재진행형인 ‘명분’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