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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Jan 25. 2023

과학과 철학 - 칸트, 헤겔, <인터스텔라>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 그레테 헤르만은 다음과 같은 확신을 표명함으로써 대화를 시작했던 듯 하다.

  “칸트철학에서 인과율은 경험을 통해 확증되거나 반발될 수 있는 경험적 주장이 아니에요. 그것은 모든 경험의 전제지요. 그것은 칸트의 ‘아프리오리’라고 부른 범주에 속해요. 우리가 세계를 인지하는 감각적 인상은 선행하는 과정으로부터 인상들이 뒤따르는 인과율이 없이는 어떤 대상과도 연결되지 않는, 느낌의 주관적인 작용에 불과할 거예요. ... 자연과학은 경험들을 다뤄요. 객관적인 경험들만이 자연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거예요. ... 그런데 양자역학은 어째서 이런 인과율을 느슨하게 만들려고 하는 동시에 자연과학으로 남고 싶어 하는 거죠?”-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유영미 역, 서커스, p197 -


  철학사에서 칸트의 위상은 합리론과 경험론의 종합으로 대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프리오리(a priori)’라는 말은 ‘선험적’이라고 번역되는데, 최초의 경험도 인식체계가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그것이 경험적 정보가 될 수 있다는 거야. 그리고 경험이 누적되면서 각자의 의미작용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그래서 칸트의 철학을 ‘구성주의’로 표현하기도 한다. 


  칸트가 최초는 아니겠지만, 칸트의 분류로 인해 시간이 인식에 범주에 들어오게 된다. 즉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팁을 이미 칸트가 말했던 것.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각자의 인과율인 거잖아. 하여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그 인식의 근거가 그가 살아온 시간의 성격이라는 것. 


  그렇다고 칸트가 관점주의를 표방하는 건 아니다. 칸트의 철학을 읽다 보면 ‘초월적’이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데, 각자의 관점을 초월한 보편성에 관한 이야기. 그러나 인식은 최소한의 시간이라도 매개하기 마련, 우리는 세계 그 자체를 감각과 해석의 관여 없이는 인식할 수 없다. 하여 우리는 사물 그 자체(물자체)에 닿지 못한다는 게 <순수이성비판>의 요지. 이 도식은 불교, 유가, 도가의 관념론 그리고 라캉의 정신분석까지 걸치고 있는 것이라, 철학사를 공부하려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철학은 존재와 인식의 문제를 다루는 영역이라면, 과학은 관찰 대상에 대한 수학적 정리를 다루는 영역이니까, 아무래도 조금 다르겠지. 그런데 왜 양자역학은 철학적 담론을 끌어들이면서 과학으로 남고자 하느냐는 질문은 던지고 있는 것.

  카를 프리드리히는 이제 칸트철학의 전제들을 더 자세히 분석하기 시작했다.

  “... 하지만 칸트는 이런 지각의 객체를 소위 ‘물자체’라는 모델에 따라 연결시키거나 정돈할 수 있다고 봐요. 따라서 일상생활에서 우리에게 익숙하며, 정확한 형식으로 고전물리학의 토대를 이루는 경험 구조를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전제해요. 이런 이해에 따르면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되는 공간 속의 사물들로, 그리고 규칙에 따라 서로 잇따르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하지만 원자물리학에서 우리는 지각을 더 이상 ‘물자체’의 모델에 따라 연결시키거나 정돈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어요. ...”


  그레테 헤르만이 카를 프리드리히의 말을 끊었다.

  “당신이 이야기하는 ‘물자체’의 개념은 칸트철학에서 말하는 것과는 좀 다른 것 같네요. 당신은 ‘물자체’와 물리학적 대상을 확실히 구분해야 해요. 칸트에 따르면 물자체는 현상에서 도저히 드러나지 않아요. 간접적으로라도 말이죠. ‘물자체’라는 개념은 자연과학과 전체 인식론적 철학에서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것을 일컫는 기능을 할 뿐이에요. ...” - 같은 책, p201 -


  카를 프리드리히가 말하는 칸트는, 실상 헤겔에 가깝다. 그리고 그 차이가, 양자역학이 전제하는 ‘이해’ 개념의 차이이기도 하다. 양자역학이 말하는 ‘불확정성’을 그대로 과학적 ‘원리’로 정립할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아직’ 모르는 자연의 섭리에 관한 문제인가, 그에 대한의 견해차. 칸트는 물자체를 인식의 바깥으로 놓아두었지만, 헤겔은 이걸 이해의 영역으로 포섭하고자 했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절대정신’인 거. 그런데 헤겔도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지의 문제인가, ‘아직’ 알 수 없는 미지의 문제인가를 고민했던 것 같은... 나도 과학 관련 저서를 읽고 있는 지금에서야 이해해 보게 된 문제.


  결국 이 챕터는 ‘이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 과학의 발전은 새로운 사실들을 알고 이해해 나가는 것뿐 아니라, ‘이해’라는 말의 의미를 늘 새롭게 배워나가는 것을 통해서도 이루어지지요.” (카를 프리드리히)

  저명한 물리학자가 <인터스텔라>의 자문을 맡았다고 하는데, 영화 중에 나온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과학’이라는 대사는 영화적 표현이 아니라 양자역학적 표현이었던가 보다.


  정리한답시고 쓰긴 했는데, 제대로 정리한 건지가 자신 없는.... 솔직하니 얼버무리고 있는 중인 불확정적 정리. 정말이지 물리학자 분들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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