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로부터
초등학교 시절의 운동회,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했던 나는 곧잘 계주로 뽑히곤 했다. 좋아하는 마음을 괴롭히는 것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했던, 그래서 무척이나 나를 싫어했던 선영이까지 나를 응원하고 있는 5학년 2반. 반 아이들의 기대를 등에 지고서 바통을 기다리고 있던 순간, 잘 달려보겠다는 설렘인지. 잘 달려야 한다는 부담감인지 모를 감정들로 요동치던 심장. 뜀박질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건만, 심박만 놓고 본다면 전력질주는 아까부터 진행되고 있었어야 자연스러울 판이다.
우승 상품이래야 고급 스프링노트가 고작이던 시절, 하지만 아이들에게 그 노트가 절실하게 필요했을 만큼 어려운 시절도 아니었다. 게다가 일반노트로 받을 것이냐 스프링노트로 받을 것이냐가 오로지 나의 각력으로 결정되는 사안도 아닌 협업의 질주. 그러나 너희들의 가슴팍에 스프링을 꽂아 주겠다는 일념으로, 치타에게 쫓기는 스프링 벅 마냥 항상 필사적으로 내게 할당된 거리를 내달렸던 것 같다.
계주의 순번에도 클래스가 있다. 스타트가 빠른 친구, 라스트 스퍼트가 좋은 친구 할 것 없이, 마지막 주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들이 충돌한다. 이 순서는 대개 서로의 장단을 떠나서 가위바위보의 우연으로 결정된다. 그해 나는 확률을 극복하고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마지막 주자가 되었다. 그러나 하필 그해, 내 앞 차례에서 가장 앞서 바통을 건네받았던 녀석이, 내게로 달려오던 중 운동장 바닥에 얼굴을 처박으며 고꾸라졌다. 처참하다기보단 우스꽝스럽단 표현이 더 적절할 정도. 녀석을 피해 지나치던 다른 반 아이들의 발길에서 이는 흙먼지 사이로, 떨어뜨린 바통부터 찾아들던 녀석이 곧바로 일어나 다시 달렸지만, 이미 한참을 벌어진 다른 주자들과의 거리, 영광의 순간은 나의 능력치 밖의 일이 되어 있었다.
바통터치가 이루어진 다른 반의 마지막 주자들이 떠난 자리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뻘쭘함. 분명 아주 잠깐의 기다림이었을 텐데, 그때는 왜 그리도 길게만 느껴지던지. 익숙한 학교 운동장에 낯설게 내던져진 듯했던 그 서늘한 느낌이 아직도 생생한 이유는, 그 이후 성장의 과정에서 적지 않게 다시 겪어야 했던 심정이기 때문이다.
그녀 역시도 나에게 마음이 있는 줄 알고 다가선 고백이었건만, 돌아온 정중한 거절이 너무도 진실돼 보여서, 더욱 창피한 마음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어느 날. 대학에 가지 못해 고교동창들의 2학기 수강신청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던 재수 시절의 어느 날. 면접관의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저 다른 이들이 쏟아 내는 모범답안을 듣고 앉아 있어야 했던 백수시절의 어느 날. 왜 내겐 그토록 제시간에 전달되는 바통이 없었을까?
바통을 기다리고 있던 내 뻘쭘함에 겹쳐지는 또 다른 기억은, 바통을 넘기는 그 짧은 순간 동안 스친 친구의 표정이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에 가득 묻어나던 미안함이 바통에 실려 건네진다. 최대한 각 나오게 결승선 테이프를 끊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잠시나마 넘어진 친구를 향했던 원망은 이미 연민으로 변해 있다.
‘걱정 마! 내가 다 따라잡을게!’
눈빛으로 전한 내 마음을 알아들었을까? 따라잡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녀석이 미안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기분 상으로는 거의 초음속 전진, 정말이지 힘차게도 달렸던 것 같다. 아직 기적은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앞서 달려간 무리 뒤에서 나 홀로 달리고 있다는 뻘쭘함을 바람처럼 가로 질러, 별 이변 없이 꼴찌로 들어왔다.
어린 시절에는 이런 순수한 정의감이라도 지니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른으로 자라나면서 그 순수를 비집고 들어차는 현실감, 어느덧 합리에만 무젖은 사유의 뇌압은 맹목적이고도 낭만적인 무모함을 생각 밖으로 밀어낸다. 쌔빠지게 달려 봐야 어차피 따라잡을 수 없는 거리,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나 홀로 달려가고 있는 뻘줌함과 초라함도 남들에게 보이기 싫다. 그래서 차라리 바통을 집어던지며 앞주자에게 따져 묻기 일쑤다. 왜 거기서 병신같이 넘어 졌냐고, 너 때문에 이제 다 글렀다고…. 굳이 달려야 할 이유도, 달리고 싶은 의지도 없다.
한참을 늦었어도 전력으로 달려가 보는 이유가 이미 1등을 위해서는 아니다. 내 앞에서 달리던 모든 주자들이 서로 뒤엉켜 넘어지는 쌔뻑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기대감에서는 더더욱 아니다. 체념의 울부짖음과 함께 바통을 집어던지느니, 최선을 다해 져보기도 하는 거다. 저 멀리서 아직 선영이가 지켜보고 있거든. 지금 상황에서야 어떤 모습도 멋있어 보이진 않겠지만, 가뜩이나 나를 좋아하지 않는 그녀에게 그런 미덥지 못한 모습까지 들킬 필요야.
가끔씩은 그 순간의 선영이를 운명의 인격화로 빗대어 볼 때가 있다. 그 순간만큼은 내게 승리의 여신이 아니었어도, 인생의 총체성으로 다가섰을 땐, 오디세우스의 여정 내내 함께한 아테나일지도 모른다는 믿음. 그런 믿음마저 없으면 바통을 놓쳐 버린 그 한순간이 내 인생 전체를 삼켜 버릴 테니까. 하여 이미 한참을 늦어 버린, 홀로 달리고 있는 뻘쭘함을 가로지르며, 심장이 터지도록, 숨이 가빠 오도록, 다시 달린다. 나의 여신과 함께….
- <불운이 우리를 비껴가지 않은 이유>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