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갓들로부터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는데, 초등학교 때 여자 아이들이 많이 가지고 다니던, 작은 유리병 속에 향기 나는 알갱이가 채워져 있던 방향제. 하여튼 대학교 때 저걸 사야 할 일이 있었다. 유리병에 두루마리 편지가 들어 있는 디자인으로…. 학관 문구점에는 없었다. 선물가게에 진열된 것들을 본 듯한 학창시절의 어렴풋한 기억으로 대학교 주변을 탐문하고서 깨달은 사실은, 시대가 변하면서 사라져 가는 풍경들 중 하나가 동네마다 하나씩은 있었던 선물가게였다는 것.
동대문 문구거리를 뒤진 끝에야 찾아냈다. 그게 뭐라고, 왜 그런 수고를 했냐고? 마음에 두고 있던 후배 녀석에게 주려고….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는데, 아무튼 내가 저걸 구해다 주면 꽤 감동인 상황이었다. 동대문에서 다시 학교로 돌아와, 마침 정문을 나서고 있는 후배 녀석과 마주 쳤다. 오는 길에 우연히 근처에서 샀다는 듯, 무심히 그 작은 병을 건네며 멋지게 돌아서는 선배의 모습. 실상 감동은 내 몫이었다.
혹시나 유리병에 말려 들어간 작은 종이를 펼쳐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동대문에서 구매할 때 아예 내 마음을 적어 넣은 채로 밀봉을 했다. 그녀는 방향제 안에 들어 있던 글을 읽어 봤을까? 나도 물어보진 않았고, 그녀도 말하진 않았고, 이제와 생각해 보니 서로 붙어 다니는 사이가 된 이후에도 그녀는 물어보지 않았고 나는 말하지 않았다.
내가 적어 놓은 글귀는, “뭘 봐? 고백이라도 들어 있을 줄 알고?”였다. 실상 고백이었다. 여자 후배들에게 살갑지 못했던 남자 선배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표현. 그 작은 유리병이 얼마나 하겠는가? 하지만 고작 그 한순간의 무심함을 표현하려고, 그 몇 푼 안 되는 방향제를 찾아 동대문 이곳저곳을…. 녀석은 영원히 모를 일, 내가 이야기를 안 했으니까. 뭐 일부러 안 한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딱히 굳이 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었다.
왜 그럴 때가 있잖아. 이 느낌 뭔지 알겠는데, 저 새끼 왜 빨리 고백 안 하고 저렇게 내 주위에서 수선만 떨고 있는지 모르겠는…. 그런데 그 새끼는 당신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엄청 수선을 떨고 다녔다는 거.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당신을 좋아했고, 당신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힘들어했고, 당신 앞에서와는 달리 많이 아파했다는 거. 그리고 편치 않은 마음으로 당신의 결혼 소식도 전해 들었었다는 거.
-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로부터>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