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백호의 슬램덩크
"자신의 이상에 이르는 사람은, 이로써 그 이상마저 넘어선다." - 니체 -
니체에게 매료된 이들에겐 그의 전형으로 각인된 필법이라고 할 수 있는 문장이지 않을까? 참 말을 멋있게 한 철학자. 오늘날과는 ‘문인’의 기준이 다른 시절이기도 했겠지만,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저 자신이 문인이라고 생각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강백호의 이상이었던 슬램덩크, 그러나 그 이상이 가능하기에 앞서 농구선수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들을 트레이닝하는 일상을 필요로 했다. 그 과정 속에서 풋내기 시기에는 보이지 않던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애초에 지녔던 이상의 지점은 뒤로 밀린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이상은 슬램덩크가 아니다. 농구 그 자체다.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의 지점에 닿는 순간, 이미 그곳은 이상의 지점이 아니다. 그곳으로 가는 여정에서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되고, 계산에 없었던 더 많은 것들을 배워야 한다. 때문에 그곳에 닿는 순간에는 이미 그곳을 넘어선 자신이 되어 있다. 그리고 다시 저 너머의 다른 이상을 향한다. 이상에 이르는 이들은 그렇듯 어제를 폐기하면서 또 다른 내일로 나아간다.
니체의 한 주제는 ‘자기 극복’이다. 부단히도 지금의 자신을 갱신하는, 고착과 안주 그리고 체계의 명분을 넘어서는 강자의 도덕. 잘 알려졌듯, 히틀러에게서는 이 ‘강자의 도덕’이라는 단어만 아전인수식으로 왜곡된 것. 정작 니체는 히틀러와 같은 작태를 노예의 도덕이라고 일컬었거늘...
그런데 니체도 당대에는 소외되었던 자신의 철학이 왜곡될 미래까지 예언하고 있었다. 실상 많은 철학들이 왜곡의 수난을 겪었다. 공자의 철학도 당대의 패러다임 안에서는, 지킬 건 지키고 변할 건 변해야 한다는,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기치였건만, 그 실존적 맥락은 간과한 채로 문장만 들어 쓰는 경우엔 꼰대들의 훈장질로 전락한다.
- <순간을 바라보는 방법>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