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데리다
데리다는 들뢰즈와의 수많은 유사성이 발견되는 철학자임에도, 꽤 오래도록 ‘기관 없는 신체’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이해하기 어렵기로는 데리다 자신의 ‘말소(抹消) 하에 둔다’가 더하면 더했지... 실상 데리다의 저 개념 자체가 이미 ‘기관 없는 신체’의 한 사례이기도 하다. 정말로 데리다가 들뢰즈를 이해하지 못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들뢰즈에 상응하는 자기 철학을 고심했던 유예의 표현이었던가, 아니면... 워낙 이런 저런 트집으로 논박을 좋아했던 데리다였던 터라, 반면 논박을 귀찮아했던 들뢰즈에 대한 질투도 없진 않았을 것 같고... 이런 성격들이 사람을 더 미치게 하잖아.
“나는 아무런 지식을 갖추지 않고서도, 삶의 습관 덕분에, 스스로를 그렇게 만드는 방식 덕분에, ‘기관 없는 신체’라는 말을 금방 이해하는 사람을 알고 있다.”
데리다를 염두에 둔 들뢰즈의 우회적인 대답은, 철학의 언어에 갇히지 말라는 함의다. 그보다는 그 철학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중요한 거지. 그 용어가 무슨 뜻인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도대체 그들이 무슨 의미를 건네고 싶어서 그런 용어를 가져다 쓴 것인지를 아는 게 더 중요한 사안이 아닐까? 그런데 이는 데리다도 공감하는 바, 시니피앙 그 자체를 숭상하는 지적 권력에는 ‘퍽큐’를 날린 그였다는 거.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실상 저런 언어의 담론도 필요한 일. 그걸 설명하고 해석하려면 부득이하게 들어 써야 하니까. 문제는 삶의 구체성을 담지한 기술(記述)이라기 보단, 전문성을 보장하는 기술(技術)로서의 시니피앙들만 난무하는 성향들. ‘깊이가 없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끝내 그 언어들을 포기하지 못하는 나부터가 그렇다. 그 언어 자체가 사유의 깊이인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담론에 심취해 있는 철학의 전문가들이, 실상 삶에는 서툴고 무지한 경우가 적지 않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철학이 인문학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던 시절만 해도, 문인과 철학자의 경계는 모호했고, 삶으로 행동하는 실천하는 지식인들인 경우가 많았고... 그러나 오늘날의 앎과 삶이 그러하던가. 글 따로 말 따로 행동 따로인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나 역시 그 표집인지 모를 일이고...
연암의 <영처고서>라는 글에 적혀 있는 구절로 마무리하자면,
全呑胡椒者不可與語味也
후추를 통으로 집어삼키는 이들과는 더불어 맛을 이야기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