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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발(啓發) - 칸트와 공자의 인식론

<논어>, '위정' 편

by 철학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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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원근법을 사용해 그린 벽화를 보고, 사람들은 그림 속에 실제로 공간이 있는 줄 알고 벽을 더듬거렸다고 한다. 시각장애인들이 시력을 되찾게 되어도, 곧 바로 일반인과 같은 원근감과 입체감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갓 태어난 아기였을 때도 지금과 같은 시력을 지녔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늘 허공으로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만지려했던 것이다. 눈의 존재가 곧 시력이고 시각인 것은 아니다. 세상의 이것저것을 둘러보고, 바라보고, 지켜보고, 살펴보는 경험을 통해 계발이 이루어진다.


철학사에 있어서 칸트의 위상은 경험론과 합리론의 종합이라는 수식으로 대리할 수 있다. 경험만으로 사유가 이루어질 수는 없으며, 경험 없이는 사유도 불가능하다. 사고와 관찰, 그 모두가 구비되어야 비로소 통찰이란 게 가능할 수 있다. 바람개비를 비유로 들자면 바람은 경험이고, 바람개비 자체는 사고력이다. 바람이 불어와야 바람개비가 돌 수 있지만, 바람개비 자신도 이미 바람에 돌아갈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현상은 이미 내부에 존재하는 인식의 틀에 맞추어진 상태로 해석되지만, 인식의 지평은 경험을 통해 넓어진다. 그래서 어릴 적에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이해가 가지 않던 것들이 어른이 되어서야 보이고, 들리고, 이해가 가는 경우들이 있다. 물론 반대로 경우도 있다. 아이들이 보고 듣는 것을 어른들은 보지 듣지 못하고, 인디언들이 보고 듣는 것을 문명인들은 보고 듣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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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에 따르면 인식의 틀을 결정하는 요인이 생각과 배움이다. 생각은 틀 자체이고, 배움이란 한계의 범위를 넓혀주는 경험적 정보라 할 수 있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비판적 사고를 거치지 않고 머릿속에 집어넣는 정보가 곧 지평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정된 지평 속에 저장된 기억의 누계일 뿐이다 보니 포화점을 넘는 것들은 망각의 경계 밖으로 밀려난다. 파지(把持)의 은혜를 입은 기억은 오히려 선입견이 된다. 이후 입력되는 정보들은 자신의 선입견을 거름망 삼아 걸러지기 마련이다.


실상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사실을 알기 보다는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당연히 독서의 스펙트럼이 넓어질 수가 없다. 자신의 눈과 마음에 익은, 읽기 편한 것들만 골라 읽고 있는 것이다. 결국엔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을 공고히 한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머리가 아닌 타인의 머리로 생각하려는 행위’라며, 사색 없는 독서와 단순한 경험에 특유의 독설을 내뱉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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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목적을 단순히 박식에 두더라도 지식의 저장용량을 늘려야 더 잘난 박식이 될 수 있을 게 아닌가. 메모리의 저장 공간을 늘리기 위해서는 지력(知力)의 계발이 필수적이다. 지식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치려면, 스스로의 사고력이 영양과 수분을 공급하는 지력(地力) 되어주어야 한다. 씨앗만 가지고 모종 장사를 할 것이냐, 씨앗에서 꽃과 열매를 취할 것이냐는 그야말로 생각의 차이이다.


공자 가라사대,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

통달하고자 애쓰지 않으면 열어 주지 아니하며, 표현하고자 애태우지 않으면 일깨워 주지 아니한다. 한 모퉁이를 들어 가르쳐 주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나머지 세 모퉁이를 추론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일러주지 않는다.


이 문장에 등장하는 啓와 發의 합성어가 ‘계발’이다. 생각 좀 하고 살라는 소리다.


배움 없이 생각만 해서도 안 된다. 언제나 자신의 지평 안에서 모든 사고가 이루어질 뿐이다. 그 결과 자기 생각만이 생각이다. 모든 인식은 자신의 선입견으로 포섭이 된다. 스피노자의 정리(定理)를 빌리자면, 결과에 대한 인식은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고 원인에 대한 인식을 함축한다. 쉽게 말해 스스로가 설정한 전제 안에서의 결과란 이야기. 당신의 경험은 세상을 채우는 수많은 사연 중에 하나일 뿐이다. 당신의 생각 너머엔 당신이 모르는 생각들이 있고, 당신의 경험 밖에는 당신이 모르는 삶들이 있다.


다른 이의 견해를 묻는다는 것은, 나와 생각이 다른 누군가의 생각을 이해해 봄으로써 반성의 거리를 유지하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생각이 같은 이들의 의견만을 수렴해 자신의 객관성을 보장받는다. 기껏 내세우고 있는 객관성이라는 것도 불특정 소수의 합의에 지나지 않는 ‘남들도 괜찮다던데….’이다. 이미 정해진 결론으로부터 선택된 표본이 객관의 경험치일 리 없고, 그것을 논거로 진행하는 논증이 논리적일 리도 없다. 하다 하다 안 되면 이젠 ‘직관’이란 단어를 들먹이며 자신의 생각을 고집한다. 비극은 그 직관이란 건 상대방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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