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 반복, 들뢰즈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란 자기 보존의 욕구다. 나 자신의 가치로 살아가고자 하는 본능,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다. 타인과 다수의 담론에 희석되지 않는, 자신으로 변별되는 ‘차이’를 유지하는 장력, 그 힘을 향한 열망이다.
자신만의 ‘차이’가 유지되려면, 자신에게서 확인된 가장 가치 있는 행위들을 ‘반복’하기 마련이다. 그 ‘반복’으로써 남들과의 ‘차이’를 유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반복된 연습으로 더 나은 수준을 갖출 수 있게 되듯, ‘반복’은 지금의 나에게 없는 ‘차이’를 생성하기도 한다. 남들과 변별되는 정체성으로서의 ‘차이’, 그리고 현재의 나와 ‘잠재적 나’의 ‘차이’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바로 ‘반복’이다. 자타공인 니체의 계승자로 불리는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개념은 이런 의미다.
정말로 자신의 가치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남들만큼이라도 살기 위해서, 남들이 하는 것들은 나도 해야 하며, 남들이 가진 것은 나도 가져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지금의 절망은 자신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남이 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절망인가? 그것이 니체가 던지는 질문이다.
앨리스 밀러에 따르면, 우리가 타인의 시선에 봉사하는 ‘거짓된 자기’를 욕망하는 현상은 일종의 우울증이다. 우울증은 타자에 대한 좌절감이 아니라 자아에 대한 상실감에서 비롯되는 증상이다. 그러나 자신이 잃어버린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그 방편으로 남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자신도 소유함으로써 소속의 안정감을 얻으려 하는 노력이기도 하다.
할 수 있는 것을 할 것이냐? 하고 싶은 것을 할 것이냐? 그러나 그에 앞서 있는 고민은, 내가 정말 뭘 좋아하는지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무의식으로 자라난 이들에게는 좋아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어 본 적도 없다. 세상이 제시하는 것들 이외에는 선택권이 없었고, 은연중에 특정 선택이 너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강요받는, 돌잡이와 같은 구성과 구도에 익숙하다. 그래서 그 동안 염원해 왔던 표상을 획득하고서도 도리어 자아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야 하는 모순이 이어진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까? 니체의 대답은 ‘놀이’다. 기꺼이 무한의 반복을 즐길 수 있는 ‘놀이’의 속성을 지닌 것들이 그 대상이다. 물론 놀이라고 한들 한결같은 재미가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놀이에는 무료함을 느끼기 일쑤, 그러나 놀이에 빠진 사람은 결코 놀이를 포기하지 않는다. 조금 더 재미있게 놀기 위해 업그레이드 된 ‘차이’를 추구할 뿐이 다. 이 서사에는 필연적으로 ‘각성’과 ‘배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니체 철학의 모든 키워드가 향하고 있는 궁극처가 ‘아이’인 이유이기도 하다.
‘차이’와 ‘반복’을 즐기는 이들은 승부욕에서 자유롭다. 좋아하는 것을 하는 이들은, 승부 자체보다는 자신의 플레이에 집중한다. 무조건 골을 넣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기술로 몇 명을 제치고 골문 앞에 다가섰는지가 더 중요하다. 오늘 졌어도 내일 다시 축구를 하고 있는 이들은 정말로 축구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들은 시장에서도 자유롭다. 당장에 돈이 되지 않는 현실이 그것을 포기할 사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될 때까지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돈에 연연하지 말라는 말 같지 않은 말 을 니체는 사양한다. 마음 편히 놀기 위해서라도 돈은 필요한 수단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도전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행복의 조건에 도전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사회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과 혼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착각으로나마 행복할 수 있다면 그도 괜찮은 방법론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이 일을 좋아하는 것일까에 대한 의심이 든다면, 적어도 내게서 무엇이 반복되고 있는지 정도는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의례, 춤, 음악, 놀이 사이의 관계는 플라톤의 『법률』에 가장 명쾌하게 서술되어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신들이 슬픔을 안고 태어나 인간을 동정하여 그들이 고민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휴식을 취하도록 추수 감사 축제를 정하고 뮤즈의 수장인 아폴로와 디오니소스를 보내 인간의 동료로서 어울리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축제 때의 신성한 사교로 인해 인간들 사이의 질서가 회복되었다.”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중에서
어릴 적의 니체는 작곡에도 능했다고 한다. 그의 미학 용어인 ‘아폴론적’과 ‘디오니소스적’은 기본적으로 음악에 관한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음악을 최고 예술 장르로 꼽았던 이유 중에 하나는, 가시적 영역이 아닌 무의식적 ‘의지’의 영역이라는 점에서이다. JYP가 늘상 하는 말, 음‘학’이 아닌 음‘악’이다. 한자 ‘樂’에는 즐겁다(락), 좋아하다(요)는 의미도 지닌다. 우리가 음악을 좋아하는 건 본능의 영역이다.
키에르케고르의 ‘반복’ 개념은 반복할 만한 가치로 확인된 것들을 반복하는 행위다. 그 양상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실존의 계보들이 다루는 피투(被投)와 기투(企投)의 문제는, 외부 조건에 의해 기어이 반복되느냐, 내면적 조건을 위해 기꺼이 반복하느냐의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