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저스 엔드 게임>의 한 장면
<어벤저스 : 엔드 게임>에서 토니 스타크와 페퍼 포츠가 서로의 뒤를 지켜주는 장면.
버클리의 경험론 페이지를 읽어 내리다 보면, 내가 볼 수 없는 뒤를 신이 볼 수 있다는 뭐 이야기가 나온다. 버클리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나 열심히 탐구하자는 거야.
버클리는 신학자이기도 했다. 신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 한 합리론에 대한 비판이자, 신학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던 거야. 우리가 알 수 없는 건, 알 수 없는 대로 놓아둘 때 더 절대적인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신일 때, 보다 상식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신앙이 가능하다.
사이비 종교들이 신이 어떻다 저떻다를 떠들어 대며 결국엔 본인이 신이라는 논리로 잇대는 거잖아.
현대철학에서는 ‘타인’이란 키워드가 미지의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는 매개다. 내가 모르는 걸, 타인이 알 수도 있잖아. 그로 인해 열리는 새로운 시간이란 것도 있고... 하여 레비나스는 타인을 나의 ‘미래’라고도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때?
본인이 모르는 영역을 본인이 아는 대로 해결하려고 들지.
실상 본인이 뭘 모르고 있는지도 몰라서 새어나오는 증상이다.
물론 주체적인 사고는 중요하지. 또한 그 타인이 사기꾼일 가능성이 있고...
남의 말에 잘 흔들리는 사람들을 ‘팔랑귀’에 빗대거나 혹은 ‘귀가 얇다’라고 표현하지만, 실상 그들은 절대로 아무 말에나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의 욕심과 부합되는 말에만 흔들릴 뿐이다. 기관 자체의 문제라기 보단 지향성의 문제라고 봐야 한다. ‘남의 말’들 중에 만류의 목소리인들 없었겠냐 말이다. 그냥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있는 책임을 신체에 전가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 이 경우는 주체적인 사고인 건가? ‘타인은 미래’의 사례인 건가?
라캉의 유명한 어록 하나. 당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확실히 모르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본인부터 의심하라고 하잖아. 생각이란 건 그로부터 시작되는 것. 단순히 의식이 있는 상태와 생각을 하고 있는 상태는 다른 문제라는 거야.
천재는 스스로를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이란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들일수록 되레 최면에 더 잘 걸린단다.
이제 좀 자기최면에서 깨어나시길. 레드 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