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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insing May 27. 2018

다 무시하고 교외로 나가고 싶은 날

#20. 가을을 차며 차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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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기분 좋은 잠을 자고 일어나니 원래 일어나던 시간보다 한 20분 일찍 일어났다. 이럴 땐 참 뭔가 엄청난 이득을 본 것 같지 않은가?

20분이나 일찍 잠에서 깼으니 아침에는 일상적으로 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됐다. 머리 맡에 있는 책을 들고 잠시 읽게 됐는데 우연히 걸린 책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이었고, 우연히 열게 된 곳이 가을 시가 있는 대목이었다. 

▼ 일본 시인 중 키야마 쇼헤이 작품 중에 '가을'이라는 짧은 시 (1933년)가 있다.

新しい下駄を買ったからと
ひょっこり友達が訪ねて来た。
私は丁度ひげを剃り終えたところだった。
二人は郊外へ
秋をけりけり歩いて行った。

새로운 나막신을 샀다고 했더니
불쑥 친구가 찾아 왔다.
나는 그때 막 수염을 다 깎은 참이었다.
두사람은 교외로
가을을 차며 차며 걸어 갔다.


하루키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신발을 새로 샀다는 이유로 친구를 찾았던 시절이 떠오른다고 하면서 이 시를 읽었을 때 젊은 사람이 쓴 시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사실 키야마 쇼헤이가 이 시를 쓴 것이 29살 때 일이다. 

하루키가 젊은 시인이라 생각했던 것은 신발을 샀다고 불쑥 친구를 찾는 건 일이 많거나 바쁜 사람이 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란다.

나막신을 샀다고 불쑥 찾아온 친구와 수염을 다 깎은 참에 함께 교외로 나가면서 가을의 어느 날, 나막신으로 길을 따각따각 차면서 가는 두사람이 너무나도 잘 묘사된 시라는 것이 하루키의 평이다.

▼ 생각을 해보니 모두 그런 일들이 있지 않았나 싶다. 

친구가 뭔가를 샀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보러 간 일들..

혹은 내가 뭔가 근사한 것을 손에 넣었다는 이유만으로 집에 쳐들어 와서는 그 물건을 구경하고 "야.. 이 XX 좋겠네.."라는 말을 연발하다가 "야.. 나가자.." 하고는 동네로 나가 근처 싼 술집에 가서는 별 얘기도 안하면서 5-6시간씩 앉아 있던 일들..


난 그런 일이 많고 많고 많았다. 
이제는 생각하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과거의 추억이 되었지만 말이다. 


얼마 전 두바이를 거쳐 서울로 오는 길에 두바이의 와인샵에 들러 고르고 골라 아르헨티나 와인을 한 병, 칠레 와인을 한 병 샀다.

고딩 동창 친구들과 좋은 음식에 먹으며 마시자는 생각에 산 건데 그걸 산 것이 8월말이었다. 

우연히 또 한 친구가 출장 일정이 잡혀 두바이에서 사온 와인 얘기를 했더니 그가 귀국할 때 유럽 와인을 두 병 사들고 와서는 날 잡아서 친구들과 모여 네 병을 한꺼번에 마시자고 한다.

그래서 친구 네 명의 일정을 맞추고 나니 그 일정이 10월 중순이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와인을 구매한 시점에서 50여 일이 지난 타이밍에 드디어 와인을 마시게 된 거다.

▼ 내 삶에서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우연히 읽게 된 이 시의 상황과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다.

혹자는 이런 계획성을 중년의 노련함 혹은 여유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 멋진 가을을 차며, 또 차며 별 계획없이 집에 찾아온 친구와 교외에 나가는 호기와 의외성은 그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렇지만 그런 호기나 의외성은 아직도 우리의 DNA 어딘가에는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일정도 상황도 무시하고 가을을 차며 차며 교외로 가고 싶다.

그렇게 하면
 지금은 조금씩 잊혀가고 있는 나의 원래 모습을 약간은 다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그러고는 다시 폰을 꺼내어 달력을 보며 일정을 확인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가볍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본다. 

By 켄 in 대치동 ('16년 8월 30일)

※ 많고 많은 가을 노래가 있지만 그중 난 한영애씨의 '가을시선'이라는 곡을 참 좋아한다. 

https://youtu.be/SLl1NaHD2vo


무라카미 라디오2: '가을을 차며 차며'에 게시된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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