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니스트리 Jul 03. 2020

그 글 내려놔, 쓰기 내가 해

아껴 쓰고, 나눠 쓰고, [      A      ], [      B      ].


A와 B의 빈칸에 들어갈 표현이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들은 아마도, 현대사 공부를 열심히 했거나 IMF 금융위기를 몸소 겪었던 밀레니얼 이전 세대일 것이다. 아나바다 운동.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라는 의미의 이 캠페인은 1998년 금융위기 시절, 국난을 극복하고자 금 모으기 등과 함께 등장한 범 국민운동이다. 하지만 앞으로  공간에서 전개할 '바꿔 쓰고, 다시 쓰자' 캠페인의 부활은 다시 도래한 글로벌 경제 위기 때문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문득 쇼핑 플랫폼 등의 무수히 많은 제품 상세 페이지에 담기는 우리말 표현들이 엉망진창이라는  깨닫게 되었고,  문장들을 올바르게 바꾸고, 다시  보는 것도 바쁜 관련업 종사자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 월간 온라인 쇼핑 총 매출액 11조 원 시대. 지금 이 순간에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제품 상세 페이지에서 글 콘텐츠가 생산, 배포, 재 사용되고 있으며, 제품을 담당하는 마케터 (혹은 그 역할을 겸하는 비 전문가)는 대체로 구색만 갖춰 공간을 채우는 목적으로 문장들을 방사(放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요즈음의 비주얼 혹은 동영상 위주 콘텐츠 소비 특성상 누구도 문장들을 세세히 살펴보거나 신경 쓰지 않아 더 나은 표현을 위해 마케터가 고심하는 일이 오히려 비 생산적 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듯, 콘텐츠 소비자들도 바른 표현을 접할 권리가 있으므로, 앞으로 기업 홈페이지, 온라인 쇼핑몰 제품 상세 페이지, 미디어 광고, 홍보 전단 등에 쓰인 어색한 문장들을 보이는 대로 선별해 고쳐 더 나은 표현을 제안하는 콘텐츠를 연재해보려 한다.


이번에 살펴볼 표현들은 C 모 쇼핑 플랫폼의 티셔츠 제품 상세페이지에서 발췌했다. 실제 사용 예시를 전하기 위해 캡처 이미지를 주로 사용하였으며, 이로 인해 이미지 해상도가 다소 낮을 수 있음을 양해 바란다.



사례 1.

퀄리티, 드레이프성 등 영어 표현의 남용도 문제지만, 업계에서만 사용하는 전문적 표현도 적절한 국어 단어로 대체 가능하다. 글을 읽은 독자층의 해당 분야 지식수준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표현의 배열도 조금 어색하다. '독특한 광택'이 이어지는 '제품의 퀄리티'의 원인으로 연결되지 않으며, 오히려 제품의 퀄리티는 독특한 광택, 쾌적한 촉감과 우수한 드레이프성 등으로 증명되는 흐름이다. 띄어쓰기는 점검이 필요하고, 높으며 의 오타 '톺으며'는 작업자의 실수다.


독특한 광택, 쾌적한 촉감 및 우수한 탄성으로 품질이 높아 스포츠 레저용으로 활용도가 높습니다. 착용 중 땀은 옷 바깥으로 배출되고 빠른 속도로 건조됩니다.



사례 2.

공간이 부족해 보이지 않은데 쉼표 뒤 간격이 없어 답답한 느낌을 준다. 단어 선택은 저작자의 자유이지만, 보통 쉼표로 구분하며 나열하는 단어는 하나의 범주 안에서 선택하는 것이 문장이 매끄럽다. 예를 들어, '학교, 회사, 집' 은 장소의 범주, '약속'은 행위의 범주, 그리고 '이너웨어'는 물건의 범주이므로 이의 통 나열은 어색하다. '등'은 한 번만 써도 의미가 통한다. 또한, 여기서도 불필요한 영어 표현이 보인다. 일상생활과 데일리라는 표현은 중복이다.


디자인적으로, 위아래 여백, 자간 및 행간, 폰트 등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겠다. 이미지 선택도 정말 ... (할많하않...)


부드럽고 가벼워 학교, 회사, 집, 여가 등 일상생활에서 이너웨어 혹은 일상복으로 즐겨 입으실 수 있으며, 다양한 색상과 사이즈로 선택의 폭이 넓습니다.



사례 3

'안심' 등 표현의 중복, 쉼표와 일반 띄어쓰기 엉망, 조사 적용 오류 등 총체적 난관이다. 무슨 의도로 작성했는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파악이 되는 것이 다행일 정도.


일관된 생산 및 품질 관리 - 고객님이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좋은 품질의 소재와 풍부한 색상을 사용해 철저한 검사를 거쳐 가공 생산됩니다.



사례 4

비록 인쇄물은 아니지만, 단어의 중복은 잉크(시간)만 낭비한다. 데일리와 아이템도 대체 우리말이 있다. '만족스럽다' 라는 형용사는 대체로 사후 평가에 사용되는 느낌의 단어인데, 미 사용 새 제품의 소개로 어울리지 않아 이 또한 대체해 보았다.


언제 어디서든, 매일 편하게 착용할 수 있어 만족도가 높은 제품입니다.



앞선 사례들은 하나의 광고, 불과 2-300자 정도의 문장들에서 발견된 것들이다. 틀렸거나, 어색한 단어의 나열인 것을 알지만, 원래 그런 것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정보의 홍수 속에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이 아니라 좀 더 많은 것을 읽고 기억할 수 있는 어린이들이라면? 우리가 그랬듯, 아이들은 집중해서 여러 광고 문구들을 살펴보고 기억할 것이며, 어느 순간 그런 단어들의 배열과 어수선한 문장들을 아무렇지 않게 여길 것이다. 사실 이런 교육적 목적은 둘째 치더라도, 더 좋은 표현의 방식이 있다면 그걸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나 하는, 좀 더 단순하고 개인적인 바람이 글바다 캠페인 시작의 이유이다.


신이 인류에게 준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인 '언어'를 아껴 쓰고 나눠 쓸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셀 수 없이 많은 새로운 표현의 문장들이 인터넷 사각지대 안에서 '광고'라는 목적 아래 무분별하게 생산되고 방치되고 복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의 고충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함께 일했던 마케터, 디자이너, 홍보 전문가들이 생각보다 문장을 '잘' 작성하는 일을 어려워한다. 그렇다고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한 마케터의 이런 리뷰나 교정이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그냥 나처럼 직업적으로 이 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바꿔 쓰고 다시 쓰는 일에 동참할 수 있다면 좋겠다.


참고로 본인은 언어학자나 국어교사가 아니고, 그저 오랫동안 이러한 광고 카피, 표현, 문구 등에 관심이 많았던 마케팅 일(혹은 잡일)을 하는 보통 사람으로, 모든 교정 제안이 문법적으로 철저히 검수된 결과는 아님을 밝힌다. 어느 세탁 플랫폼 캐치프레이즈에 보이는, “그옷내려놔, 빨랜내가해” 와 같이 광고적 허용으로 의도된 표현은 시시콜콜한 교정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이기도 하다.




※표지 사진과 제목 형식- 개인적으로 정말 마음에 들었던 한 세탁 플랫폼 서비스 광고의 사진과 캐치프레이즈로, 다음뉴스와 중앙일보에 게재된 자료사진 인용

작가의 이전글 잠재 전파자의 48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