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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니스트리 Nov 03. 2020

기억의 완성

"그때의 기억은 어때?"


어린 시절 파리에서 살다 왔다는 친구에게 물었다.


"아니, 나 어릴 때 기억이 거의 없어."


우리 나이로 6-7세부터 중학교 입학까지 꽤 오랜 시기를 해외에서 보냈다는 친구가 답했다. 뒤이어 나는, 내가 얼마나 오래전 기억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했다.


"아마도 미취학이었을 정도로 어렸을 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고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어. 어두컴컴해 빛이 하나도 없는데, '죽어서 땅 속에 묻힌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냥 잠을 자는 것과 같을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걸까?'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 '산다는 게 뭐지?'라고 생각했어. 난 아주 어릴 때부터 정말 생각이 많았던 것 같아."


한참 이런 주제로 떠들던 이야기를 들어준 친구가 감사하면서도, 열띤 대화가 오가지 않았던 걸로 봐선 친구에게 그 이야기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던 듯 해 미안하기도 하다. 이 이야기의 주제가 '죽음에 대해서'가 아닌, ‘아주 어릴 때의 기억 일부가 선명해 신기하다’라는 것 정도는 전달되었을까?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많아 나눌 이야기가 많았던 나는 문득 그때의 기억이 많고 적음이 기억력에서 오는 차이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이해력은 몰라도 기억력이 썩 좋은 편이 아니다.) 그렇다면 유전일까? 아버지께 들은 당신의 한 토막, 어린 시절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마치 꿈속처럼, 철길에 제법 쌓인 눈을 고무신이 밟으며 나던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해."


아버지에 따르면, 당시 어머니의 어머니, 즉 당신 외조모님께서 돌아가셔서 황망히 어린아이였던 아버지를 둘러업고, 한 겨울 눈 내린 기찻길을 따라 잰걸음으로 걸으며 흐느끼시던 어머니 등에서의 기억이었다고. 할머니 생전에 이 일화를 들으실 때면 세 살 무렵 일을 다 기억하냐며 놀라곤 하셨다. 아버지의 기억력이 나쁜 편이 아니지만, 생에 최초 기억일지 모를 이 선명한 단편을 기억력으로 설명하기엔 무리가 있다.




어느 연구 결과에서, 서양인은 3.5세, 동양인은 평균 4세 정도가 일반적인 생애 최초 기억의 시작이라 하고, 그 이전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은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의 성장과 연관 있다 한다. 과학이 합리적이라면 우리 모두는 그 시기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왜 내 친구는 본인의 6-7세 이전 기억이 별로 없다고 한 것일까? 기억이 아닌 흥미의 차이는 아닐까? 그 기억이 무엇이든, 그런 주제로 하는 스토리텔링 자체에 관심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기억을 글자대로 해석하자면 기(記)는 기록이고 억(憶)은 마음(心)의 의미(意)로, 머리로 하는 생각과 감각이 느끼는 감정 모두 기억의 소재다. 특이한 냄새, 소리, 칠흑 같은 어두움 등, 우리가 처한 모든 환경에 그때의 생각이나 상황이 연결되는 것이라면, 모든 것이 새로웠을 주변 환경을 다소 '남다르게' 받아들이던 어린아이의 감각이 그 시절 기억의 단편들을 전하는 펜과 종이가 아니었을까? 어두컴컴한 이불 속이든, 눈 내리는 겨울 기찻길이든, 그렇게 일상적이지 않았던 이벤트 속 신기하거나, 아름답거나, 재미있거나, 아팠던 것들에 대한 생각과 감각을 포함한 모든 장면이 생에 최초 기억들 속 특별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어른이 된 지금은 그때와 비교도 되지 않은 많은 양의 생각들을 하고 살지만, 어린 시절 추억으로 이야기할만한 기억의 단편들은 좀처럼 저장되지 않는 것 같다. 즐거움은 쉬이 잊히고 아프거나 미운 일들만 잘 떠오르니 세상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던 그때의 순수함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어린 시절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한 것을 엄마에게 물어봤다가 이 아이 천재라며 영재학원에 등록당해 '생각하는 문제'들에 시달려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누군가의 기억처럼, 다소 왜곡되더라도 존재하는 ‘어느 시간  어느 공간 그땐 그랬지'식의 흐릿한 기억은 그렇게 전해지고 공감되며 우리 모두의 순수했던 시절을 증명한다. 그런데 그런 공감이, 오늘따라 참 그립다.




아침 출근길에, 비 온 후 맑게 갠 하늘과 대조적인 아직 젖은 땅 위 낙엽 무더기를 바라보며, 나뭇잎의 운명이, 빗방울의 무게가, 그와 같이 잊히는 모든 존재들에 대하여 생각한 사람이 있을까? 생각은 했어도 이야기할 상대가 마땅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생애 첫 기억일지 모를, 아빠 손 잡고 걷는 저 아이의 눈에 비쳐 아로새겨질 이 장면이, 언젠가 누군가와 나눌 이야기의 단편일 수 있다는 믿음이 그나마 건조한 낙엽을 적신 빗방울 같아 위로를 조금 받는다.


예전에 적었던, <꿈을 이야기하던 동료의 빈자리>에 등장하는 그 동료와 나눴던 '꿈'에 대한 이야기와, 최근 혼자만 신나게 친구에게 늘어놓고 미안했던 나의 ‘어린 시절 처음으로 한 죽음에 대한 생각’의 공통점은, 괜히 꺼냈다가 요즘 말로 TMI 혹은 진지충이라 놀림받을 위험성 충분한 주제라는 것이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주택가의 전선들로부터 '조각난 하늘'을 이야기하던 그이라면 이런 이야기도 재미있게 나눌 수 있을까? 꿈을 이야기하던 어느 동료처럼, TMI를 풍성한 이야기보따리로 환영해줄 그 사람이라면.


그림: <Continuous line drawing of a father and son lovely family concept Father's Day card.>, 라이선스 부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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