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일상 속 커피 이야기
'커피'라는 단어를 대할 때면 함께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쉼, 위로, 대화, 따스함 과 같은, 왠지 느리게라도 앞으로 걸어가게 해줄것만 같은 그런 의미들.
지금부터 목적 없이, 두서없이 할 이야기는, 글 쓰다 별생각 없이 집어든 빈 커피잔과 같을지 모른다. 다시 한 잔 채우고 싶어질.
표지 이미지 : Nich Harsell (unsplash.com)
요즘 직장인들은, 따뜻한 커피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더 찾는 듯하다. 날씨와는 관계없다.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다.
열정보단 냉정이 더 필요한 때라서 일까?
문. 이른 아침 출근중인 고객이 카페에 들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다음 중 바리스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A. 완벽한 커피 맛을 위해 분쇄도를 측정한다
B. 머신 주위 청소되지 못한 잔여 이물질이 있는지 점검한다.
C. 고객이 하루를 기분좋게 시작할 수 있도록 덕담을 건넨다.
D. 고객이 주문한 즉시 최대한 빠르게 음료를 제공한다.
일상에 늘 함께하는 커피가 궁금해 공부를 좀 해볼까 하다가 SCA 인증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했다. 커피 공부를 하며 알게 된 많은 사실들은 흥미로웠다. 원두 종류마다 로스팅(roasting) 시간이 다르고, 각각 적당히 볶아진 원두는 적절한 분쇄도로 갈아줘야 하며, 간 커피 알갱이 입자 크기에 따라 커피 맛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완성된 커피 한 잔의 맛은 커피 원두의 품질이 반, 로스팅과 바리스타 스킬이 절반이다. 하지만 SCA에서 가르치는 '좋은 바리스타의 조건‘ 중에는, 좋은 원료를 선별하고, 정확한 과정을 지키고, 기기와 주방환경을 청결히 관리하는 것 이외에 어쩌면 더 중요할지 모를 덕목이 있다. 바로 고객을 편하게 대하는 배려와 센스이다.
아침에 가장 바쁜 시간 바리스타가 할 일은, 잘 분쇄한 커피 원두에 예열한 거름지 위에 천천히 시계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붓는 적당한 온도의 온수로 내리는 것보다, '최대한 빠르게 고객이 주문한 커피를 내놓는 것'. 열정보단 냉정, 업무 전문성보단 관계 전문성이 더 유용할 때가 많은 회사란 공간과 바리스타의 주방은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 SCA 바리스타스킬 필기시험에 출제된 저 문제의 답은, 당연하게도 D다.
이런 대중성 못지 않게 중요한 바리스타의 스킬과 일에 대한 열정, 그리고 창의력은 분명 커피 마니아들에게 감동을 준다. 마니아까지는 아니지만, 커피를 좋아하는 일반인이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커피 자체는 쉼이고, 위로고, 대화이고, 소재다. (물론 당이 떨어지고 있는 오후 네시쯤 책상 위에는 아직 차가운 아이스 화이트 초코가 있지만 말이다) 커피를 상징하는 단어 중 '쉼'을 가장 좋아한다. 커피 뒤엔 마침표보다 쉼표가 어울리는 것 같다. 처음 매봉에서 '카페, 진정성'을 발견했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카페, 진정성'은 소통과 교류의 공간이었다. 커피 맛도 좋았지만, 공간이 편하고 좋았던 기억이다. 평소 잘 모르던 동료와 식사를 하고, 마치 아끼는 사람에게 비밀스러운 소장 작품을 꺼내 보여주듯 그렇게 소개하던 공간이었다.
바다 건너 멀리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가게 하는 핑계고
아침의 허기를 잊고 급한 업무를 처리하게 해 줄 힘이고
어제의 의기소침 뒤 또 희망차게 하루를 살아가게 할 용기고
글을 한참을 써도 다 전하지 못할 의미 있는 이야기의 시작이다.
"좋은 아침이에요!"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모자 쓴 사장님이 있는 그 카페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잠시 쉬어가고 싶을 때 눈앞에 나타났다. 게으른 이의 늦은 아침으로는, 아무렇게나 가다가 우연히 만난 카페의 라떼와 크로와상 샌드위치가 어울린다. 그러다 왠지 익숙해 귀 기울여 들어보니 카페에서 우리나라 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사장님과 눈이 마주쳐 인사하며 '이 노래...' 하며 물으니, 아내분이 한국분이라고 한다. 손님도 한국분인 것 같아 틀어드렸다고.
한 정거장 먼저 내려 서성이며 길을 찾던 사람을 이끈 것은 왠지 따뜻한 분위기의 카페 입구였고, 마음이 편안해져 좀 더 머물고 싶게 한 것은 주인장의 배려였다. 커피 맛도 맛이지만, 카페의 분위기, 사람, 배려하는 마음과 같은 것들이 객을 이끄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왠지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문화와 같달까.
회사의 이벤트를 마치고, 연극이 끝난 무대를 바라보는 그런 기분으로 회사 커피를 한잔 하며 쉬고 있는데, 한 동료가 말을 걸어온다.
“머신에 커피 다 드셔 보셨어요?”
아메리카노와 라떼 정도라고 답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한다.
“다이얼 안 돌려 보셨어요?”
동료가 알려주는 대로 커피머신의 다이얼을 돌려보니, 이름 한 번은 들어봤거나 생전 처음 보는 커피 메뉴들이 나왔다. ‘나만 모르고 있었나?’하는 생각에 몇몇 다른 동료들에게 물어봤다. 그들도 대체로 모르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안도 뒤에, 문득 이런 사소한 정보가 동료들의 회사 생활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어졌다.
이로부터, 회사 안팎의 흥미롭거나 유용한 주제의 이야기를 동료에게 전하는 콘텐츠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리얼 커피코너(Real Coffee Corner)'라 불리는, 직원 참여형 컬처 콘텐츠 활동의 시작이었다.
- 작가의 다른 글, <그중에 그대를 만나> 중
일 하는 중에도, 여행을 하는 중에도, 문화 속에도, 상상 속에서도 존재하며 늘 한잔의 위로가 되는 커피는 딱 한 가지 아쉬운 것을 꼽자면 잘 '식는다'는 것이다. 가장 맛있는 농도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시간이 지날수록 얼음이 녹아 맛이 옅어지고, 갓 추출한 에스프레소의 최적 온도도 잠깐 뿐이다. 그런데 사무실에서 잘 식는 것은 비단 커피뿐만이 아니다.
회사원의 식어가는 열정을 다시 채워주는게 온도 빼앗긴 채 방치 중인 커피 한 잔의 역할이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한창 자판을 두드리다 마실 타이밍을 놓친 미적지근한 커피를 잠시 바라보자니 커피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뜨거웠던 내 열정 네가 다 가져갔니?"
외부보다 싼 가격에 커피를 제공하는 사내 카페를 운영하면 여러 문화적 관점에서 장점이 많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 봤다. 맛있는 커피를 저렴하게 제공하고, 일정 수익과 회사의 지원을 더해 인건비 등 운영비를 충당하는 사내 카페는 소통의 중심이 될 것이다. 이에 적합한 소양을 갖춘 바리스타가 사내 카페에서 할 수 있는 이런 활동 어떨까?
커피와 음료 제조 클래스를 열고 관련 동호회 운영하고, 음료 콘테스트를 열어 직원의 이름이 들어간 시즌 음료를 출시해 판매한다. 직원 복지라는 가치가 상당한 이 카페에서 생화, 원두, 회사 브랜드가 새겨진 잔을 판매한다. 급한 감사와 사례가 필요한 누구든 카페에서 정성스럽게 포장된 선물을 구매할 수 있다.
바리스타는 음료 제조 뿐 아니라 직원들의 고민상담 창구가 된다. 안정적인 고용이 인정되는 이 자리는 커피를 제조하고 제공하는 단순한 과정 이외에도 크리에이티브와 소통의 의지가 있는 사람이 어울릴 것이다.
상상에서 비롯됐지만, 이런 모습의 사내 카페를 운영하는 회사도 분명 있을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그저 맛없는 쓰디쓴 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떤 이에게는 채식주의자의 삼겹살 회식처럼 곤란한 것일지도 모른다. 또 어떤 이에게는... 하지만 여기 커피 덕분에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노라고 조용히 회고하는 이가 있다. 이 순간에도 원고를 마감했다는 핑계로 한잔하려는 사람이.'
- <생존 커피>, 최하나 -
우리가 '커피'라는 단어로부터 떠올릴 어떤 이미지는, 조금 씁쓸해도 다채로운 매력과 편안한 휴식이 있는 그런 '삶'을 닮은 모습이면 좋겠다.
※이 글은 원티드 인살롱 x 기고만장 에도 기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