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동료들과 함께한 겨울 태백 산행
거대하고 웅장한 느낌의 이름과는 달리 그곳을 넘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했다. 이름마따나 하얀 눈꽃 가득한 백색의 자연에서, 적당한 거리를 큰 어려움 없이 걷다 보면 마주하는 이웃 산들과 그것을 잇는 환상적인 백두대간의 절경을 마주할 수 있을 거라 했다. 하지만 자연은 역시 자연스러운 인과만을 허락했다. 적당한 노력으로 얻는 결과는 적당한 것들 뿐이라고, 더 크고 감격스러운 것을 위해선 그만큼의 노력을 해야만 한다고, 마치 빠르다 느려지고, 거칠다 차분해지며 쉼 없이 밀고 당겨 방문한 이들의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는 오페라의 유령처럼, 반 정도만 가린 하얀 눈꽃 가면의 태백산은 마음의 준비도 없이 쉽고 편하게 찾은 이에게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골짜기엔 뽀득뽀득 눈 밟는 소리만 가득했다. 새 지저귀는 소리는 당연히 없었다. 간혹 흩날리는 눈발과, 우리들의 발자국 소리만 공간을 채운다. 눈은 대체로 길을 향한다. 미끄러운 길에서 걸음 하나하나 조심 해야 했기에, 먼 풍경을 프레임에 담을 기회는 걸음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당기고 있는 '마주함의 시간' 너머로 잠시 미뤄둔다.
가끔 예상치 못한 거센 '바람'이란 사건이 공간에 휘몰아친다. 드러난 몸의 모든 부위가 시려 잠시 몸을 돌리고 시선을 아래로 떨구니, 다시 고개를 들자 드러난 경치는 시련의 시간 끝 보상이 된다. 왠지 이 산과 이 계절이, 산을 찾은 이의 의지에 앞서 그의 몸을 돌리고 끌며 인형놀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도 들었다.
이번 여행은 이 계절 태백산엔 흰 눈이 쌓여 그곳을 찾은 이에게 적당한 시련과 넘치는 보상을 줄 것이라 미리 안 경험자와 그를 따르는 스무 명 남짓의 동행이 함께했다. 그들 중에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과, 산 보단 사람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여전히 함께이거나, 예전에 함께였던 사람이 있다. 어떤 목적이든, 어디에 있든, 산에 간 이들은 모두 정한 곳으로 나아간다. 앞선 이, 따르는 이, 그들을 살피는 이 모두 지금을 걷고 미래에 닿는다. '함께'하는 산행은 그런 의미다.
'몸을 데운다. 불편한 만큼 귀하다. 인심이 후하다. 잠시의 쉼이다. 위로가 된다. 따스함이다. 그리고, 추억이다'
찐 감자를 넣어주는 겨울 태백의 즉석라면은 옛 동료들을 닮았다.
이번 산행은 여느 여행과 달리 멋진 절경을 눈앞에 두고도 사진을 찍기 수월치 않았다. 쉬는 시간도 아껴가며 몸이 얼지 않도록 애썼지만 공기와 가장 가까운 신체부위부터 점차 아파올 정도로 공기는 차가웠고 바람은 매서웠다. 그래서일까, 사진보단 눈에 더 담으려는 의지가 강해졌고 그 장면들은 이젠 녹아 얼었던 감각을 되찾은 손 끝을 지나 이곳에 자리한다. 사진에 의지하지 않으니, 그때 눈에 담겼던 눈길의 선명한 자(字) 국이 남긴다. 그 것은 흔적이라기보단 진한 스케치를 닮았으니, 그것 또한 설산의 선물이 아닐까.
하산을 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겨울, 잘 다져진 눈밭, 그것이 덮고 있는 적당히 가파른 내리막에서 가능한 '썰매 타기'는 조금 전 겨울의 큰 산 강풍 앞에 겸손과 조심을 배운 어른들을 다시 철부지 어린아이로 만든다. 방석을 닮은, 접고 펴는 휴대용 이 작은 플라스틱 조각은 타는 법을 익히면 잠깐의 스릴을 맛보게 해 준다. 오르는 행동은 내림의 쾌감을 위해 존재하는지 모른다, 는 생각이 들게 한 장면. 코너가 없고, 누군가 잡아줄 이가 있다면 시도해 볼 만하다.
"저는 산행에서 이 지점이 가장 좋더라고요. 왠지 조용하고, 완만하고, 무사히 잘 다녀왔다고 안심할만한 지금 같은 길이요"
하산 길 마지막 3분의 1 정도를 남긴, 완만한 경사에 멀리 목적지가 보이는 지점에서 동행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늘 편하고 즐거웠기만 한 시절일리 없겠지만, 지나고 보니 남아있는 좋은 기억과 반가운 옛 동료들을 닮은 산행 마지막 1km 지점은, 그렇게 북적이던 인파도, 맞서 눈을 뜨기도 어려웠던 천제단의 바람도 없이 고요함과 편안함 뿐이었다.
SAP 등산 클럽 'Alpinist'와 함께했습니다.
산악대장: 박세진 | 사진: 심기훈
당골광장 - 반재 - 천제단 - 백단사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