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그날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
어느 장소, 어느 음악, 어느 향기로부터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하곤 하는 이런 기억 유도제들로부터 우리는 추억한다. 글도 그렇다. 오래전 쓴 글을 보고 있자면 그 글을 썼던 공간, 분위기, 그 시기 함께한 사람이 떠오르기도 한다.
추억에 찾아본, 아직 끝나지 않은 그 글의 발행 날짜는 8월 29일, 3년 전 오늘이었다.
글의 영감이 되었던 대화 상대가 있었다. 글은 서로를 아직 잘 모르던 시기에 지었다. 이상하게 생각이 닮아있던 그이는 '벚꽃'에 대해 말했다. 벚꽃이 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바람을 타고 흩어지고 또 모이는 모습이 마치 만나고 헤어지는 우리네 삶 속 인연을 닮았다는 감상이었다. 공감했지만, 왠지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그런 벚꽃잎의 만나고 헤어짐이 인연이지만, 소중한 인연은 쉬이 끝을 맺지 않기를 바라며 쓴 글이다.
이 글에는 마침표가 없다. 물론 사람의 인연이란 그이가 말한 벚꽃잎처럼 만나고 또 흩어지고 시작과 끝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날 써 내려간 글 에는 그런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쉼표만 가득한 그 글이 발행되고,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벚꽃으로부터 인연을 생각한 이는 조금 멀리서 자신의 삶을 (잘)살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서 영감을 받아 글을 지었던 나 자신은 현실에서 방황 중이다. 그 글은, 벚꽃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벚꽃의 본질을 담지 않은 듯하다. 꽃이란 원래 지고 나야 그 자리에 싹이든 열매든 이어질 테니, 벚꽃이 지는 것은 새로운 시작(깨어남)의 의미도 된다. 그러니 글도 이어짐을 위해선 벚꽃잎이 지는 것처럼 제대로 끝맺어야 했다. 제대로 끝맺음을 하자면, 모든 순간의 이음에 최선을 다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 글 이후의 삶은 마침표 없는 문장을 닮았고, 여전히 맺지 못해 새로운 시작이 없는 아쉬운 분위기다.
여전히 어디에 마침표를 둬야 할지 모르겠는 불완전한 상태지만, 여전히 그 글은 내게 소중하다. 최근 수십 년 만에 돌아온, 마지막 에피소드를 리마스터(remaster) 버전으로 개봉해 최장시간 상영의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애니메이션 대작 '슬램덩크'의 그것처럼, 이 이야기도 반복되더라도 열린 결말로 오랜 감동으로 울림 있기를 바랄 뿐이다.
끝나지 않아 맺지 못한 이야기의 두 번째 장이 있다면, 제목을 이렇게 하면 어떨까?
잠들지 않아 깨어나지 못하는
우리 삶.
“여길 봐! (wake up!)"
언젠가 먼 이국땅에서 자전거를 빌려 도심을 여행할 때, 길이 익숙하지 않아 핸드폰의 지도를 보며 주춤하고 있는 내게 맞은편에서 오던 라이더가 다급히 외친 한마디였다. 그는 ‘조심해요(watch out)’ 라거나 ‘앞을 봐요(look forward)’ 라 하지 않고 '깨어나라' 했다. 그가 깨우고자 한 상대는 잠든 이가 아니었다. 그는 현실에서 멀어진 정신 못 차린 이에게 위험을 경고했다. 잠들지 않았지만 잠든 것과 다름없었다. 때로 잠든 것보다, 현실에서 멀어진 의식이 사람을 더 위태롭게 한다.
'주여, 저는 잠든 이를 깨어나게 할 수는 있어도 잠든 척하는 이를 깨울 수는 없었나이다'
어느 드라마 속 대사가 떠오른다.
앞선 자전거 타는 청년의 다급한 목소리로 깨울 수 있었던 대상은 현실을 보지 못하는이 였고, 신부가 깨울 수 없던 대상은 스스로 깨어있다고 착각하는 이였다. 참고로, 깨어난다(awakening)는 표현은 불교에선 '깨우침'의 의미로 쓰이고 자연에선 봄 새싹이 움트거나 꽃이 피는 것을 나타낸다.
3년 전 여름, 같은 날 쓴 글 속에서 피어난 벚꽃은 지고 또 내려 이리저리 모이고 흩어지는 나약한 존재였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그런 벚꽃을 닮아 깨어있지 못한 미생을 살고 있다. 현실에서 잠든다는 것은 맺음이고, 현실에서 깨어남은 시작이다. 둘 다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러니 두 번째 장에선, 아직도 맺지 못하고 버리지 못한, 미련한 미련만 가득한 스스로를 고해(告解)하고 싶다.
하루를 맺듯 잠이 들고, 또다시 깨어나 현재를 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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