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돕는 용기 vs 내가 편할 용기
경기도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서울로 출퇴근하던 때 경험한 일입니다. '빨간 버스'라 불리는 버스는 가운데 통로를 중심으로 좌우로 두 줄씩 좌석이 있었는데, 자리가 아무리 많아도 버스를 타려는 사람이 더 많아 늘 부족했습니다. 그러니 편히 의자에 앉아 갈 수 있는 행운을 얻으려면 조금 더 부지런해야 했습니다. 정신없는 출근길에 피곤한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댈 수 있다면 이동시간 40분은 휴식이 되므로, 타려는 사람이 길게 줄을 서 기다리다가 비로소 버스에 올라 의자에 앉는 것은 행운이라 부를 만했습니다. 가까스로 부족한 손잡이를 찾아 부여잡고 어떻게든 버티며 가는 사람들과 편히 의자에 앉아 가방을 끌어안고 몸을 기댄 사람들, 하나의 통로를 사이에 둔 상반된 두 입장이 공존한 공간은 아등바등 뒤엉켜 살아가는 우리 일상을 밀도 높게 압축한 듯도 했습니다.
그날은 다행히도 좌석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버스가 출발을 하고, 자연스럽게 혼란의 바깥세상으로부터 의식이 분리되며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여유로운 마음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여러 영상 콘텐츠를 훑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멀미가 오는 듯해서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때, 이리저리 흔들리며 가는 많은 사람들 중에 오른편에 선 한 여자분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임신부용으로 보이는 큰 원피스를 입은 그는, 옷차림 때문인지 임신부처럼 보였습니다.
그 버스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광역 버스이고 통로에 손잡이가 없는 구조였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통로에 서서 가는 일은 부족한 좌석 사정에 편법 혹은 비 공식적으로 허용되던 일이었습니다. 그런 구조와 공간의 한계로, 광역버스에서 통로에 서서 간다는 것은 사실 더 많은 체력을 요구해 꽤 피곤한 일이었습니다. 그걸 아는 입장에서 보고도 모른 척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생각보다 먼저 몸이 반응을 했습니다.
"여기 앉으세요"
휴대폰을 보던 그에게 일어서서 자리를 가리키며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의외였습니다. 그 여자분은 눈은 동그래지고, 낯빛은 붉어지며 나를 향해 손을 내저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거절의 말을 듣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큰 실례를 저질렀구나'.
"저,... 아니에요"
굳이 '임신부'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은 임신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려던 것임은 서로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살짝 숙여 목례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휴대폰에 얼굴을 파묻고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다시는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정확히 그때부터였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 무렵부터 적극적으로 남을 돕는 일을 그만두게 된 것 같습니다. 사회 풍토야 어떻든, '남을 돕는'일이 즐겁고 편한 일이라고 믿고 행하던 의식에 잠재된 일종의 코드는 더는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원치 않는 친절'을 경계하는 일종의 트라우마는, 어쩌면 당연할지 모를 친절도 가로막았습니다. 이를테면, 전철에서 교통 약자(처럼 보이는 이)를 봐도 쉽게 자리를 비키지 않게 된 것이죠. 언젠가는 전철 역사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계단을 오르는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노인분을 지나쳐 한참을 걸어가다 다시 그 계단으로 돌아간 일도 있었습니다. (아마 누군가 도와드리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 무거운 걸 지고 끝내 도움 없이 계단을 오르셨을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경험을 떠올리자면 일종의 타협과도 같은 핑계로 자책을 면하곤 하는 것이 안타까워집니다.
회사에도 비슷한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요즘 세대들의 직관적인 언어라며 리더의 업무 지시에 (지시라는 단어도 요즘 핏(fit)은 아닌 것 같으면서도) '왜요?', '제가요?', '지금요?'를 말하는 우리 동료들의 솔직한(?) 용기를 이해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면서도 '물론이죠', '언제든지요', '별말씀을요'를 말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합니다. (그렇게 자주 말하는 이를 오히려 '영혼 없다'며 폄훼하지 않으면 다행인 정도...) 과감한 이성이 적극적 감성을 앞서는 현실에서, 도움이 곧 '오지랖'이 될까 싶어 그냥 회피하거나 못 본 척한다는 것은 일상이든 업무 중이든 일반적입니다. 내가 입을 손해를 적극 피력할 용기는 커지고, 다른 이를 대가 없이 도울 용기는 점점 작아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운동선수도 자신을 믿어야 과감한 플레이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실패를 하더라도 후회를 하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반대로 스스로의 판단에 대한 조금의 의심은 주저함으로, 주저함은 후회스러운 결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적어도 남을 향한 배려의 영역에서는, 종종 그걸 깨닫는 요즘입니다.
다행히도 여전히 대다수의 동료들은 자신의 일이 아닌데도 타인을 돕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원래 각자가 다른 모양의 퍼즐 같은 사람들이 모여 전체적으로는 잘 어우러진 세상을 이룰 수 있도록 사이사이를 메우는 조각들 같다고, 생각하며 포근해져 보는 아침입니다.
이 글은 HR 플랫폼 원티드 인살롱에 기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