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이탈리안 에스프레소
출장길 비행기 안. 좁다 못해 무릎이 앞 등받이에 닿을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낍니다. 예전에는 열몇 시간 여행도 괜찮았던 이코노미 좌석이 고작 몇 시간 만에 불편하다고 느끼는 건 나이가 들어 참을성이 약해져서인지, 아니면 여행의 설렘이 줄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리를 꼬았다 풀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집어든 모닝캄 잡지에서 스코틀랜드의 한 소설가가 여행에 대해 이야기한 문장이 와 닿았습니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행을 위해 여행한다. 위대한 것은 움직이는 것 자체다.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어딜 가려는 의지, 계획, 이동의 과정, 되새김의 시간 등, 그 모든 과정이 곧 여행이라고 여기고 그 가치 스펙트럼을 더 넓게, 경계는 흐릿하게 그리려 하기에 쉽게 공감한 문장입니다. 그러니 제가 여행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적어도 계획이 틀어지거나 변수가 생겼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좋아. 계획을 벗어난 (크게 해롭지 않은) 이벤트에 의미를 양념으로 치며 자주 속으로 하던 말입니다. 이는, 적당한 타협이나 무조건적인 긍정과는 다릅니다.
여행의 조건
여행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에도 등장합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루카 9:3)
예수님은 길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어디에 가든 떠날 때까지 처음 머문 집에서 머물고, 받아들여지지 않아 떠나야 할 때에는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리라 하십니다. 많은 해석에서 이 부분을, 예수님의 오직 복음을 전하는 본연의 목적만을 생각하고 어떤 현실적인 집착도 가지지 말라는 가르침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 마음의 변덕이나 더 나은 것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섣불리 떠나지 말라는 의미이며, 받아들여지지 못한 곳에는 미련을 남길 것 없다 하신 말씀입니다.
인스타용 사진에 집착하다가 정작 멋진 광경을 직접 볼 기회를 놓치는 거며, 살 물건에 너무 집착하다가 얻어야 할 경험에 소홀하는 등 우리는 자주 그 본질을 잊고 여행합니다.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제게는 물건, 재화,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행위 등, 여러모로 맥시멀리스트로 살며 삶의 본질을 잊고 있지는 않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 가르침입니다.
좁은 좌석의 불편함을, 그동안 못 본 영화들을 왕창 몰아 보며 견디는 동안 이탈리아 밀라노에 도착했습니다.
보편의 가톨릭
밀라노는 패션의 도시입니다. 패션의 도시라 부르는 이유는 많은 유명한 명품 브랜드들이 밀라노에서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밀라노를 이야기 할 때 명품 브랜드는 빠질 수 없는 소재입니다. 저는 명품 브랜드를 말할 때 그 비싼 값 보다도 값어치에 주목합니다. 즉, 지나온 시간과 그로부터 성숙한 이미지,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에 각인되고 전해지며 균형감 있게 부푼 브랜드 스토리가 곧 가치를 만든다고 믿습니다. 대중이 원하고 사랑하는 브랜드는 마치 씨간장 같아서, 많은 파생 브랜드의 원료나 영감, 혹은 상징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명품은 종교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신화가 상징이 되고, 그로부터 생겨난 문화로서 그렇습니다.
물론, (종교적 관점에서) 창조주의 피조물인 사람이 만든 것을, 창조주 자체가 상징인 종교에 빗대어 말하는 것은 어리숙하거나 미숙한 주장일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어 꼭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밀라노를 상징하는 가톨릭과 함께, 두 가지가 공유한 하나의 가치는 상징성이며, 가톨릭만이 가진 것은 바로 보편성입니다. 명품 브랜드는 상징적으로 존재하며 영향과 파생으로 문화가 됩니다. 그렇지만 결코 보편화될 수는 없습니다. 보편 됨과 동시에 특별함이라는 존재의 이유를 잃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톨릭은, 또는 교회는 모든 이에게 허락된 보편성이 주요 본질 중 하나입니다.
'거룩하고 보편 된 교회'는 가톨릭 주요 기도문 중 하나인 사도신경의 두 번째 믿음에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고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과 이어진 교회의 거룩한 역할을 이야기하며 많은 이들의 믿음 한가운데에 보편을 강조한 것은, 결국 가톨릭은 결코 소유할 수는 없지만 주위와 함께 나누면 행복한 가치 그 자체라서가 아닐까요.
...,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 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두오모
밀라노에서의 첫날, 이 도시의 상징이자 가톨릭 최대의 문화유산 중 하나인 대성당에 들렀습니다. 점심이 채 되지 않은 시간에 도착한 대성당이 있는 두오모 광장에는 너무 많은 인파가 있었습니다. 축제와도 같은 현장.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두오모 대성당의 웅장함은 예나 지금이나 감탄을 자아냅니다. 세속의 복잡함 따위, 이 건축물의 경이로움 앞에서는 사라질 하찮은 먼지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워도 몸도 마음도 오래 그 곳에 머물기는 어려웠습니다. 인파에 이리저리 쓸리며 주위를 걷다가, 발걸음을 돌려 그리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걷다가 다시한번, 도시 자체가 예술작품 같다고 느꼈습니다. 밀라노의 중심부를 걷다보면 골목마다 대리석 건축물을 쉽게 마주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오랜 기간에 걸쳐 짓고, 더 긴 시간 사람의 손으로 고치고 관리한 유산들입니다. 너무 변화가 빨라 따라가기에 숨찰 지경인 건조한 도시로부터 온 행객은, 앞으로도 크게 변함없을 이탈리아의 아름다움이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
성 토마스 성당
걷다가 다른 성당을 발견했습니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밀어 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단층 성당의 본당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실내는 다소 어두웠고,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벽에는 가톨릭 성인을 그린 오랜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의자며 집기들은 낡아 보였지만 견고히 공간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기도가, 그 바람이 오랜 세월 이 의자에서 하늘에 닿았을까요? 1576년에 건립된 성 토마스 성당(Chiesa Rettorile di San Tommaso Apostolo)은 누구나 머물며 기도할 수 있는 거룩한 공간이고, 걷다가 지친 행인에게도 열린 보편 된 교회입니다. 그리고 제게는, 미련과 집착으로부터 멀어져 마침에 이른 오늘 영혼의 쉼이었습니다.
에스프레소
토마스 성당 바로 옆에는 작은 카페가 있습니다. 직원들은 친절하고, 주인으로 보이는 바리스타 아저씨는 더 친절한 카페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하고 티라미수와 에스프레소를 주문했습니다. 첫 모금을 마시고 설탕을 넣었습니다. 티라미수는 다소 아쉬웠습니다. '역시 이런 건 우리나라가 잘 만들어'라는 생각을 하며, 남은 에스프레소를 입에 털어 넣습니다. 조금 전의 쓰디쓴 첫 모금과 달리, 강렬한 달콤함이 입안을 감쌌습니다.
에스프레소는 여러 커피 음료의 맛을 결정짓는 근본이자 기본입니다. 에스프레소(espresso), 마키아또(macchiato), 콘파냐(con panna) 등, 여러 대표적인 커피 음료들이 이탈리아어라는 것은 이탈리아가 커피 문화에서 중요한 상징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디에서나 맛볼 수 있는 에스프레소와 그 응용 커피들. 모든 보편 된 커피의 시작인 존재가 마치 가톨릭 문화의 심장 이탈리아 같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