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라테 마키아또
참 할 이야기 많은 이탈리아 밀라노 여행도 이제 끝이 보이는 시점입니다. 어찌 그리 무엇 하나 원활하지 않은지, 출장길이라 더욱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는데도 어려움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나라와 다르게 이곳은 공공기관이든 사기업이든 느긋하고 천하태평입니다. 한국에서 현지로 중요한 물품을 먼저 국제특송 서비스로 보냈는데도, 중간에 통관에서 그 속을 썩이더니 현지 배달이 무한정 지연되는 바람에 결국 받지 못하고 일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쉬운 접근성이 아닌 엑스포 행사장에서 전철을 타려고 했는데, 그날 하필이면 지하철 파업이라서 운행을 안 한다고. 어찌어찌 돌아오긴 했지만, 무척 피곤했습니다.
좁은 호텔보다 낫겠다 싶어서 동료와 함께 이동한 새로운 숙소. 평이 좋아 선택한 고즈넉한 아파트는 공간이 넓어 좋았는데, 가구가 낡아 삐걱대더니 급기야 자다가 침대가 주저앉기에 이르렀습니다. 매트리스를 걷어내니, 확장형 침대의 조립이 어긋났는지 제대로 구조의 지지를 받지 못한 한쪽의 받침이 아래로 U자로 휘어 있었습니다. 도움을 요청해 봐야 바로 해결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사진만 찍어 두고 그냥 차근차근 다시 조립해서 매트리스를 얹어 온전히 했습니다. 집은 또 온수가 잘 나오지 않아 추워진 외기에 아침저녁으로 소심한 찔끔 샤워만 겨우 가능한 정도입니다.
그 집에서 머문 지 이틀째에는 또, 우리가 밤새 시끌벅적한 파티를 했다고 이웃으로부터 무슨 민원이 들어갔다면서, 계속 이러면 공권력을 이용해 퇴거조치 시킨다는 주인의 협박 메시지도 받았습니다.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출장 와서 머무는 집에서 파티라니요. 마음도 시간도 여유가 많지 않은 서글픈 출장길에, 시차 적응도 늦어 퇴근하면 녹초가 되어 불 끄고 자기 바쁜데 그런 오해를 받으니 너무 속이 상했습니다. 주인에게, 매우 불쾌하다며 못 믿겠으면 와서 어떤 파티의 흔적이라도 있나 살펴보라고 항의하자 그제야 자기들이 오해한 것 같다며 사과를 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마태복음 6:14)
해가 짧아진 겨울에 밀라노 시내 외곽은 저녁 7시만 되어도 무척 어둡습니다. 가로등 조도가 우리나라보다 낮은 것이 낭만적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요즘처럼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낀 어두운 골목은 조금 으스스한 기분이기도 합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지친 걸음을 이어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매우 맑고 청아한 종소리가 들렸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한 높은 시계탑 위 십자가가 눈에 띕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늦추며 첨탑 위 성모상을 바라고 성호경을 그었습니다. 종소리는 이미 끝나 그 여운마저도 잦아들고 있었지만,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고 편안해진 기분이었습니다. 그때, 머릿속에 최근 출장으로 가지 못한 미사에서 늘 신부님으로부터 듣던 통상문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형제 여러분,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우리 죄를 반성합시다.
조금 전까지 좀처럼 맘처럼 잘 되지 않는 어려움만을 탓하고 원망했는데 뜬금없이 우리의 죄 라니요. 하지만 하고 싶지 않아도 그냥 저절로 자연스럽게 기도가 이어졌습니다.
'내 주장만 옳다고 믿었습니다. 다른 이의 의견을 쉽게 묵살하고, 부정하고, 그의 행동을 탓하고 내가 옳다며 우쭐댔습니다. 그에 반하면 또한 화도 잘 내었습니다. 그 모든 생각과 행위를 반성합니다'
아침에 택시를 타고 도심을 지나며 문득 길가의 나무들이 참 키가 크고 울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스마트폰으로 여행이 편해졌지만 그로 인해 정작 그 도시를 몸으로 경험하고, 눈으로 보고, 가슴에 담을 시간은 줄어든 느낌입니다. 작은 화면 속 편리함과 사진과 영상 기록에의 집착은 여행을 여행답지 못하게 만든다는 아이러니. 잠시 휴대폰을 내려놓고 바라본 택시의 창문 밖은, 수일을 머물렀지만 깨닫지 못한 여전히 새롭고, 또 아름다운 세상이었습니다. 어제의 청아한 종소리가 아침 길거리 풍경으로 이어짐에 감사한 하루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런 날 아침에는 부드러운 거품이 감싼 라테 마키아또가 제격입니다. 사실 부드러운 맛이 보듬는 중화된 쓴맛을 좋아해 라테는 평소에도 가장 많이 마시는 커피입니다. 적당한 스팀으로 데운 우유와 최적의 유지방이 부풀며 생긴 라테 거품은 커피가 식어도 그 볼륨이 쉽게 꺼지지 않습니다. 책상에 앉아 일을 하다 보면 그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다 식어서야 잔을 다시 드는 일이 많아, 제게는 식었을 때 맛없는 그냥 커피보다 그래도 마실만한 라테가 좋습니다.
우연히 발견한 한 작가님의 글에서, 저의 옛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오래전 사랑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 모두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아주 어린 나이였는데도 아버지께서 읽으시던 '암, 알면 이길 수 있다'라는 책의 저자에게 전화를 시도할 만큼 간절했던 첫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또한 20대 후반에 암을 발견했고, 수술이 어려운 정도로 커지고 전이도 됐었는데 다행히 방사선과 항암 치료의 효과가 좋아 십수 년째 재발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나를 죽이는 암과 나를 살리는 너'
필명으로 암 투병기를 브런치에 연재한 작가님이 있습니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발견한 암에 용기 있게 맞서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며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야 했던 작가님은 읽기 편한 언어로 그 과정을 전했습니다.
경험으로부터 암의 무서움과 그것을 겪는 당사자,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을 알기에, 작가님의 글을 처음부터 발행 순서대로 읽으며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그의 글에 파묻혀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희망을 보다가도, 또 가로젓고, 끝내 울었습니다.
글의 시작부터 나중으로 갈수록 작가님의 점차 바라 마지않는 것이 작아짐을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기적, 다음에는 희망, 그리고 고통의 해소. 전반적으로 변함없이 큰 것은 곁에 머물면서 그 고통을 나눠지고 또 안아준 연인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작가님의 글을 보는 게 힘들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생판 모르는 남의 일인데, 글로 접하면 그게 꼭 내 이웃, 내 사촌의 일처럼 현상 몰입이 되고, 외피 벗은 감정 저 깊숙한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부작용으로 인해 항암을 이어가지 못하고 나빠지는 상태, 사라지는 희망의 빛. 한동안 글이 올라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 마치 투정 부리듯, '글 기다리고 있다'며 댓글을 남겼습니다. 원래라면 길고 정성스럽게 답글을 적던 작가님은, '감사합니다' 한 단어로 모든 댓글에 답을 했습니다. '많이 아픈가', 걱정에 우울감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오타 가득한 글이 하나 더 발행되어 읽다가 끝내 눈물을 지었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기다리는 독자를 위해 글을 남긴 작가님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부디 그이가 고통에서 벗어나고, 남기고 전한 글이 내외의 평화 되기를 빕니다.'
주어진 많은 것들이 사소하고 당연하다고 여겼던 저를 일깨워준 작가님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신은 지지 않았습니다
의지를 억누르는 고통에도 글로써 많은 이들에게 삶과 사랑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작가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