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화이트 초콜릿 모카
"용기 있게 마주할 수 있어야 문제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이야"
들으면 왠지 잊는 것도, 마주하는 것도 두려운 추억의 장면들이 떠오를까 봐 밝은 노래만 찾아 듣는 내게, 친구가 말했습니다. 믿음에 배신당했다고 여기고 미움과 그리움, 사죄와 용서를 넘나들며 감정이 파도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이니 나 스스로 바라보고, 내 의지로 그것을 치우거나 지울 용기가 없어 어둡고 그늘진 방구석에 그냥 밀어둔 물건들, 사진첩 속 사진들은 그렇게 오늘도 밝아보여야 하는 내 삶의 이면에 존재합니다. 그 어둠으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은 아직도 먼 이야기라는 것을, 때 늦은 낙엽 세례를 맞으며 깨닫습니다.
내게 성당이란
가을 한복판에, 비처럼 낙엽 내리는 성북동 거리를 지나다가 오랜 교회를 보았습니다. 함께 걷던 지인이 그걸 보더니 제게 '종교가 있냐'는 질문을 해서, "일요일에 미사를 갑니다" 하고 답했습니다. 벌써 수개월째 예비 신자 교리공부를 하고 있고, 이제 바로 다음 달이면 세례를 받게 되니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저의 종교는 천주교입니다. 지인은 종교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종교를 갖는 것은 어떤 의미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종교를 갖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게 성당은 안식처인 것 같아요. 나를 괴롭히는 문제가 대체로 사람에 비롯된 것인데,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풀리기 마련이지만 미운 마음은 잘 떠나지 않거든요. 최근 다른 일이 있어 한 2주간 성당을 못 갔는데, 그러자 기도도 흐릿해지고 어떤 장면으로부터 불현듯 누군가를 향한 미운 마음이 불쑥불쑥 들더라고요."
실제로 저는 성당을 다녀오면서 믿음에 의지를 다집니다. 일상의 경험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미사 시간에 접하는 성경의 말씀이나 강론의 구절이 크게 와닿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주일에 최소 한 번은, 나만의 치유 루틴을 갖는 것은 여러모로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 제게는 성당이고, 누군가에겐 자연, 영화관, 부모님 계신 본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꼭 종교가 아니더라도, 나를 온전히 하고 내면을 돌보는 치유(healing)와 재충전의 루틴, 그리고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인 것 같습니다.
분명 가을이 한참 지나 초겨울의 날씨여야 할 이 시기에, 아직도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다행인지 불안인지 모르겠습니다. 공무로 인해 멀리 떠나 있다가 돌아와 참여한 오랜만의 미사를 마치고, 늦가을 차가운 바람이 낙엽 지는 성당 주변 길을 잠시 걸으며 오늘 미사 시간에 듣게 된 이웃 성당 신부님의 강론을 되새겼습니다. 미사를 주재하신 신부님은 우리 성당 교우들에게 성전 재건을 위한 도움을 부탁했습니다.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환경이 좋지 않은 성당도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당은 모두 아름다운 모습인줄만 알았습니다.
이웃 성당은 규모도 작고 환경도 썩 좋지 않다고 합니다. 신부님에 의하면, 성당을 신자들이 오직 굳은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가며 십시일반 힘을 보태어 관리하고 있지만, 건물을 더는 고쳐 쓰지 못해 새로 지어야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37)
이웃 성당 신부님은 강론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렘브란트의 그림과 함께 소개했습니다. 그림 속에서 사마리아인은 여관 주인과 함께 마주보고 있고, 여관 직원으로 보이는 이가 다친 행인을 말에서 내리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비롯된 이야기를 유화로 표현한 것입니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묻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을 해야한다고 답하십니다. 그러자 율법 교사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재차 답을 구합니다.
예수님은 강도들이 행인의 옷을 벗기고 때려 초주검이 되게 하고 방치한 행인을, 보고도 처음 지나쳐간 사제와 두 번째로 그냥 지나쳐간 레위인, 그리고 도움을 준 사마리아인을 비유로 들며 율법 교사에게 묻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를 만난 이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율법 교사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렘브란트의 유화는 사마리아인으로부터 구조된 행인과 그를 돕는 이웃의 손길을 표현합니다.
외면하지 않는 내면
전철 역사에서 쓰러진 사람을 보고 '어이구 술도 적당히 마셔야지'하고 혀를 차며 피해 가지 않고 필요한 도움을 주는 행위는 우리의 선한 내면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고령의 연로하신 아버지가 탄 휠체어를 끄는 노인이 무사히 지날 수 있도록 출입문을 붙잡아주는 행위와, 유모차를 버스에서 내리려는 사람을 수고롭다 생각하지 않고 돕는 것도 그렇습니다. 원래 사람에게는 그런 착한 내면이 있는데, 세상은 남의 어려움을 애써 외면(外面)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니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당연하고 마땅하다는 생각, 즉 '감사의 마음'의 결여와 '누군가는 도움을 주겠지'하며 소극적이 되는 집단 속 몰개성화가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기부는 도움 중 가장 쉬운 일입니다. 기도는 믿음을 가진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성스러운 도움입니다. 저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성당 재건의 모든 어려운 과정을 감내하며 이겨내고 또 해낼 이웃 성당 교우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작은 힘이나마 보태기로 다짐했습니다. 저는 우리 성당의 공간이 온전하고, 아름답고, 생기 있음에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삶으로 눈을 돌리면, 추운 바람을 피할 수 있고, 더울 때는 뜨거운 빛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작지만 포근한 집이 있음은 감사한 일입니다. 추억할 좋은 기억이 있고, 성장의 발판이 된 상실과 아픈 경험 있음도 감사해 마땅한 일입니다.
외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남의 어려움뿐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 내 안에 자리 잡은 그 뿌리 깊은 문제, 마음의 약한 부분과 균열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고 돌보는 일이 그로부터 해방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서서히 나의 시선을 감사한 것들로 돌리고, 감사한 공간에 머물며 선한 마음을 꺼내다 보면 더없이 좋은 일상, 좋은 삶이 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