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따뜻한 라테
여행에서 호텔에 머물 때, 많은 경우 객실 침대 옆 서랍에 책 한 권이 들어 있습니다. 호텔에서 머문 기억의 처음이 언제였는지는 잘 몰라도 그 책을 발견한 순간은 또렷합니다. 아마도 영어로 적혀 있었을 내용은 모른 채, 그저 '낡은 이 책은 뭐야'라며 펼쳐보지 않았던 기억입니다. 오랜 뒤에야 그 책의 정체를 알았습니다. 손때가 타고 해진, 오랜 시간의 흔적이 있는 책 표지에는 'Holy Bible', 즉 '성경(聖經)'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천주교 예비 신자 교리 과정 중에는 성경의 개념과 구조를 설명하는 교과가 있습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 총 73권으로 이루어져 있고, 히브리어 성경에 그리스어로 추가된 내용이 있고, 라틴어 및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 보완되며 현대 성경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성서(聖書)라고도 합니다.
아직 교리 과정 중이라도 내 성경책 한 권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교보문고에 가서 ‘가톨릭 성경’을 샀습니다. 스스로 성당에 찾아가서 예비 신자 과정에 등록한 저의 경우에는 누군가로부터 그 것을 받거나 얻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필요해서 산 성경이지만, 올 해 모든 소비를 통틀어 가장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네스북에 등재된 사실이 증명하듯 성경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입니다. 인터넷만 찾아봐도 성경은 쉽게 접할 수 있으며, 성경의 말씀은 우리 삶 곳곳에 유무형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성경책 실물은 의미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머리맡에 두고 가끔 펼쳐보거나 받아 적기도 하는 등, 말씀을 만나는 매개체, 혹은 믿음의 징표 같아서 입니다. 성경책 위에 손을 얹고, 성실한 직 수행을 맹세하는 것이 전통이자 관례인 미국 대통령의 이취임식 절차를 보더라도 역사적으로 성경은 진실과 약속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I do solemnly swear that I will faithfully execute the Office of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and will to the best of my Ability, preserve, protect and defend the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
("나는 합중국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내 능력을 다해 미국 헌법을 보존하고, 보호하고, 수호할 것을 엄숙히 맹세합니다.")
교리 공부를 통해 그 개념을 알고, 또 각 과(科)마다 적절한 성경 인용구를 접하며 이해해도 성경 전체를 통독하고 본의를 새기는 것은 단위의 세월이 걸릴 만큼 긴 여정이 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사서 가지고만 있는다고 그 말씀이 내게 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펼쳐 읽어야 하는데 첫 장을 시작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천주교 세례를 통한 새 신자가 되는 과정에는 '성경 필사'라는 과제가 주어집니다. 필사(筆寫)는 손으로 베껴 적는 것을 말합니다. 책도 전자책으로 많이 읽는 요즘에는 필사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저는 필사에 대한 거부감은 크게 없었습니다. 원래도 손 편지를 쓰는 일을 불편함 없이 해 왔고, 메모도 메모장에 직접 적는 걸 선호해 노트를 펼쳐 첫 글자를 적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분량은 '마르코 복음서' 전체였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를 한 자 한 자 진지하게 써 내려가면서 그 말씀을 또한 품고 이해하려는 노력도 했습니다. 분량이 너무 많아 상당 부분은 무의식 속에 쓰기도 했습니다. 성경은 종이가 얇고 글씨가 작아서, 손과 어깨가 아플 만큼 적어야 책 한 장을 간신히 쓸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시작하고 얼마 뒤 까지는 아직 남은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총 660여 절로 이루어진 마르코 복음서는 하루에 10절 정도씩 쓰면 66일, 즉 두어 달이면 다 쓰고도 여유 있는 분량이었습니다. 그래서 보통은 영상 콘텐츠나 보며 때우던 자기 전 시간에 성경을 필사했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는 것을 끝으로 무언가 노트에 적을 일이 잘 없다고 생각했는데, 참 오랜만에 본 펜과 노트의 진정성 가득한 만남이었습니다.
하지만 매일매일 꾸준히 쓰던 습관은 열흘을 채 넘기지 못했고, 한두 달은 필사를 잊고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곧 필사본 제출일이 임박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정말 필사적으로 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시간의 속도를 과소평가 했구나!’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느님께 마지막 기도를 올리시며 제자들에게 '깨어있으라' 했건만, 저는 말씀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 죄로 손과 어깨의 통증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성경 책은 종이가 얇아 아무리 써도 그 양이 줄지 않아 계속 솟는 샘 같았습니다. 그 귀하고 좋은 문장들을 음미하기는커녕 양이 많다며 불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는 장면부터는 그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최후의 만찬’ 부터는 점점 이 서사의 흐름에 몸이 내 맡겨지게 되었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는 장면에서는 화가 났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하고선 예수님의 예언이 옳았음을 깨닫고 우는 장면에서는 저도 같이 울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저런 수모와 고통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는 시점까지 모든 절마다 가슴이 먹먹해 탄식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면서도, 사람과 같이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필사를 마무리하며, 성경 속 많은 문장들이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귀한 진리가 가득한 보물창고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꾹꾹 눌러쓴 노트 필사를 마무리하며 새김의 여운을 다시 한번 느껴보았습니다. 자정을 지나, 그날의 첫 해를 맞기까지 불과 두어 시간을 남긴 그 시각 스피커에서 흘러 나온 노래는 <Angels>였습니다.
'내가 약하다고 느낄 때, 내가 고통의 외길을 걸을 때, 난 위를 바라봅니다. 나는 항상 사랑으로 축복받을 거라는 걸 알아요'
When I'm feeling weak
And my pain walks down a one way street
I look above
And I know I'll always be blessed with love
- 'Angels' by David Archuleta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마르코 복음서 1:1)
마르코는 이야기를 쓰며 성경에서는 처음으로 '복음(유앙겔리온, εὐαγγέλιον)'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복음은 구전되는 복된 이야기입니다. 필사로 성경 속 예수님의 일대기를 빈 노트에 적으며, 믿음의 향기에 깊이 빠져 기쁘게 허우적대던 며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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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사진: Unsplash의Tolu Akinye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