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터스 일일 베이킹 클래스 체험기
하늘이 높고 말은 살찌는 계절도 지나고 어느덧 겨울 한복판이다. 겨울 초입에, 부쩍 쌀쌀해진 공기에 부랴부랴 겨울옷을 꺼냈지만 말 대신 찐 나의 군살 탓에 여러 벌의 옷들이 꽉 낀다. 그래도 야구며 자전거며 주말활동도 꾸준히 했던 그 어느 시절에는 겨울에 살이 찌더라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갈수록 추위를 더 타니 먹고 자고 이외에 여가를 즐기지 않아 요 몇 년 새 봄에 무거운 몸 이끌고 시작하는 첫 바깥 활동이 두렵기까지 했다. 요샌 송년회도 많아 지인들과 모이면 그저 잔부딪히는 소리가 더 익숙하다. 하지만 술자리는 그때만 좋고 그 자체의 추억이 없다. 추억은 곱씹지만 추억은 없는, 아이러니한 술, 술, 술자리들. 그런 톡 쏘고 마는 평범한 탄산수 같던 일상에 라임 한 조각 같은 상쾌한 소식이 들렸다.
내가 많이 애정 하는 동심을 가진 어른들 커뮤니티 ‘더크리에이터스’는 원래 직원들이 모여 작가처럼, PD처럼, 아나운서처럼 회사 내 다양한 문화요소를 소개하는 콘텐츠를 자발적으로 제작하며 시작했다. 지금은 회원수가 꽤 많아졌고, 여럿이 참여해 배울 수 있는 활동들을 이어가며 정식으로 회사의 지원도 받는 동호회가 되었다. 비록 퇴사를 했지만 꾸준히 초대해주는 고마운 모임에서 최근 기획한 활동은 바로 ‘베이킹 체험’이었다. 관심이 있다면 비슷한 활동을 이어갈 수도 있고, 꾸준히 한다면 직업이 바뀔 수도 있는 베이킹. 우리는 그 겨울밤 빵 중 가장 기본이라는 ‘식빵’을 만들러 갔다. 그간 여행, 그림, 캘리그래피 등 여러 세션에서 무언가 예술적 결과물들을 만들어오던 크리에이터스는 이름에 걸맞게 많은 추억을 만들었지만, 결과물이 '먹을 수도 있는' 것이었던 적은 없었다. 매우 신선한 경험이 될 것이었지만 사실 처음에 크게 끌리지 않았었다. 그것은 바로 편견에서 비롯된,
재미가 있을까?
라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베이킹이 취미인 어머니를 둔 덕에 제과와 제빵은 참 힘든 작업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름은 빵이지만 과정은 100을 요하는 제빵은 정확함, 노련함, 그리고 정교함이 필요한데, 나에게 모두 없거나 부족한 자질이다. 하지만 직접 해보는 것은 처음인 묘한 기대감, 그리고 이 멤버들과 함께라면 아마도 모내기나 용접 같은 노동도 예술이 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기에 참여해보고자 했다. 걱정했던 것만큼은 힘들거나 어렵지 않았지만 역시나 결과는 실패로 돌아갈 그 도전을 위해 향한 곳은 한강 이남 서울의 끄트머리, 세곡동에 위치한 ‘아뜰리에 셰지'였다.
아뜰리에(atelier). 화가, 조각가, 건축가 등 아티스트(artist)들의 작업실을 뜻하는 이 단어는 아마도 프랑스어라서 이렇게 발음하고 표시하는 것인지 몰라도, 사실 정확한 한글 표기는 '아틀리에'가 맞다. 아뜰리에 건 아틀리에 건, 이 단어는 언제부턴가 많은 카페, 꽃집, 또는 디저트 전문점이나 베이커리에 쓰인다. 그 맛과 쓰임 못지않게 보이는 모양도 중요한 시대라서 일까? 우리는 셰프, 파티셰, 플로리스트 등을 아티스트라 인식하고 그들의 작업장인 키친, 베이커리, 플라워샵을 아틀리에 즉, 공방이라 부르는 것에 거부감이 없다. 오늘의 공방은 바로 베이킹을 위한 작업실이고, 우리를 이끌어줄 분은 솜씨당에서 찾은 전문 파티셰(pâtissier) 강사님이다.
양재에 위치한 회사에서 퇴근 후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금요일 저녁이라 차가 많이 막힌다. 어쩌면 속 메마른 건어물로 꽉 채운 식빵을 닮은 버스는 속을 꽉 채운채 모락모락 김을 내뿜으며 느긋느긋 남쪽을 향해 움직인다. 약 30분간 이동해 비가 막 오고 갠 습한 공기가 제법 상쾌하게 느껴지는 세곡동의 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어렵지 않게 찾은 작업실엔 넓은 작업 선반과 반죽 기계, 그리고 낯익은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 조금 늦게 도착해 이미 강사님이 열심히 오늘 만드는 빵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누구는 말하고, 누구는 듣고, 그 사이 반죽은 기계 속에서 돌고. 기계가 하더라도 적절한 힘으로 적당한 시간 안에 반죽을 해줘야 하므로 강약과 시간은 신경 써야 한다.
반죽 상태에 따라 결과물 품질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한다. '적당히'라는 중간을 찾기 어려운 빵. 이번에 만드는 식빵은 쌀이 주원료로 들어가는, 재료는 간단하지만 처음 경험하는 사람이 전 과정을 다 해보기엔 어려움이 있어 재료 배합과 반죽 과정까지는 강사분이 준비하며 설명으로 우리의 체험을 대신했다. 설명만 듣자니 식빵이 참 매력적인 게, 단순하지만 분명 지켜야 할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모양과 맛이 화려한 빵들은 오히려 그 구성중 어느 하나가 부족하더라도 다른 무언가가 채우기도 할 텐데, 이번에 만들 쌀 식빵은 쌀(혹은 밀가루), 물, 버터, 우유와 달걀(혹은 생크림), 소금과 설탕, 약간의 이스트가 재료의 전부다.
단순하다면 단순하고 어렵다면 어려운 이 과정은 일반인도 곧잘 따라 해 완성할 만큼 간단한 일이다. 다만 반죽이 완성된 타이밍을 잡는 건 손의 감각으로 한다. 이 부분이 초보자에겐 어렵다. 강사님은, "반죽에 윤기가 생기고, 눌러봤을 때 움푹 파였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면 글루텐이 잘 형성된 반죽이라서 이제 숙성시킬 준비가 된 거예요" 라 말했다. 강사님이 적당한 무게를 알려줘, 각자 큰 덩이의 반죽에서 떼네어 저울을 달아 동글동글 굴려 숙성시킬 준비를 한다. 겉면에 윤기가 나는 상태가 좋다. 너무 큰 힘을 주어 어느 한 곳이 찢어지면 안에서 충분한 이스트 발효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완성된 숙성 전 단계의 반죽이 꼭 방금 찜기에서 꺼낸 호빵 같아 귀엽다.
숙성이 필요한 것이 어찌 식빵 반죽뿐일까. 나에게도 아직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도우에 작은 상처라도 생기면 잘 부풀지 않아 제 본래의 모습을 찾기 어려우니, 소중한 사람을 대할 때 그의 마음에 생채기 없도록 잘 보듬고 배려하는 것이 너도 나도 성숙한 관계의 길이 아닐까?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식빵 반죽은 실온에서 약 20분, 중간 발효라는 것을 하게 된다. 중간 발효의 시간 동안 빵 속에는 드라이 이스트가 부풀 어오를 준비를 마치게 된다. 이 한 덩어리가 '살아 있다'는 것의 증명. 이스트가 일종의 '휴식시간'을 갖는 셈이다. 중간 발효를 마친 빵 반죽은 밀대로 밀고, 이를 겹쳐 틀에 담아 실제 구워졌을 때 빵의 모습이 되도록 모양을 잡는 패닝(panning)의 과정을 거친다. 이때 중요한 것이 바로 섬세함. 이미 생물인 반죽을 너무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적당한' 힘으로 균일하게 밀대질을 해야 하며, 손바닥으로 누르고 접어 모양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손톱 등으로 표면이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다룬다.
빵의 부드러운 식감을 위해 충분히 부풀 수 있도록 상온보다 높은(약 30℃) 온도로 2차 숙성을 한다. 정상적인 발효를 위해 필요한 온도와 습도를 모두 맞추기 위해 '발효기'에 반죽을 넣는다. 발효도 또한 '적당한' 온도에서 '적절한' 시간 동안 해야 한다. 너무 온도가 낮으면 발효 시간이 늘어나고 빵 겉면이 거칠어지거나 식감이 좋지 않게 되고, 반대로 너무 높으면 과발효가 일어나 잡균이 번식하거나 맛이 시어지게 된다. 패닝 후 사각 틀에 넣어 약 60분간 발효시킨 반죽이 준비되면, 굽는다. 굽는 시간에는 딱히 할 일이 없다. 이야기 빵을 굽거나, 춤추고 논다. 약 60분의 시간이 지나자 강사님은 오븐을 조금씩 열어 빵의 상태를 확인한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지나 마침내 우리의 첫 식빵이 모습을 드러낸다. 미리 밀가루로 각자의 이니셜을 새겨둔 빵틀을 벗고, 갓 태어난 빵이 모락모락 김을 내며 세상에 나오자 그 과정을 함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감격의 환호가 들렸다. 내 빵만 빼고. 영상 촬영한다고 대충 손댄 도우가 마침내 절규의 얼굴로 시위했다.
마음이 잠시 아팠지만, 강사님이 구운 빵을 대신 주기로 해 마음의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빵 맛을 본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쫄깃하고, 달콤하고, 고소하다. 아무것도 없이 먹어도 냠냠 맛있다. 이 빵엔 커피보다 우유가 어울릴 것 같다.
과정의 기억만이 아니라 '결과'도 집으로 가져갈 수 있고 그것을 먹을수도 있다는 것이 큰 매력이기도 한 베이킹 클래스. 무엇이든 함께로도 어울리고, 그 자체로도 충분한 매력을 지닌 오랜 우리의 주식 식빵은 우리 모임 '크리에어터스'와 닮아있다. 같은 커뮤니티에서 봄에 참여했던 활동이 떠올랐다. 당시 주말에 시간을 내어 포천의 한 목장에 가서 우리는 목장에서 생산된 우유로 리코타 치즈를 만드는 체험을 했는데 어린이들이 하는 찰흙놀이같은 그것이 또 색달랐다. 모두가 공감할 부분은 아마 우리가 체험하기로 결정한 동기가 '치즈' 자체에만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관계며, 성과며, 경쟁에 지친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하는 '과정'에서 얻는 보람에 목말랐던 것이 아닐까? 식빵이든 치즈든 결과가 나빠도 좋고, 결과가 좋으면 더 좋고, 때론 그 과정만으로도 충분히 좋다. (우리가 왜 모여야 하는지,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등 뻔한 질문을 하지 않는 우리 모임은 더더 좋고)
오늘 이후 어느 배구 스포츠 스타의 정감 있는 욕지거리를 자꾸 식빵이라 포장하지 않기로 했다. 한 번 경험해보니, 식빵은 겉보다 속이 부드럽고 깊은, 누군가의 애정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