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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 완치

가시를 품은 장미 #1 - 항암 후 완전관해, 그리고 회복

by 케니스트리

아직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던 무렵이었다. 불안한 외기와는 달리, 심적으로도 실내 온도로도 따뜻하고 평화로운 성당 카페에서 그녀와 처음 이야기를 나눴다.


“반가워요. 나이가 몇 살이에요?”


요즘 다른 상황이었다면 꽤 어색하고 불편한 질문이었겠지만, (마음의 벽이 낮아지는)성당 카페란 공간에서 생긋 웃으며 다가온 그녀로부터의 나이 질문은 이상하게 거슬리지 않았다.


“나보다 어리구나. 잘 왔어요.”


방금 만들었다며 건넨 샌드위치 두 개를 받아 들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짧은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모르는 듯 보였다. 지금 인사를 나눈 내가, 미사 때 바로 뒷줄에 앉아 ‘평화의 인사’를 주고받았던 사람이란 걸.


인상 깊었다. 미사 내내 앞줄에 앉은 그녀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까맣고 단정한 옷차림, 작은 체구, 조용하지만 마치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 몰입, 그리고 진실한 기도의 모습. 그 순간만큼은, 그녀는 밝고 주위가 잠시 어두운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물론, 원래 미사라는 것이 많은 이들과 ‘보이지 않는 믿음의 끈’으로 연결되는 듯한 유대의 시간이긴 하다. 하지만 그날은 조금 달랐다. 일방향의 끈이라도, 연결이 조금 더 또렷하게 비쳤다.


그녀의 짧은 머리는 유독 눈에 들어왔다. ‘스포츠머리’를 겨우 면한 정도의 길이. 일부러 그렇게 잘랐다면 대단한 센스라 여겨질 정도로 그녀와 잘 어울렸다. 물론, 보통이라면 ‘무슨 사연이 있나’ 하고 먼저 상상했을지도 모르겠다.


카페에서의 첫 만남은 그래서 특별했다. 카페로 그녀를 찾아간 것은 아니었지만, 수녀님과의 대화 후 만나게 됐고, 또 대화를 이어갈 인연의 시작이 됐다.


성당 카페


“저... 성당에 뭔가 기여하고 싶은데, 제가 할 일이 있을까요?”


수녀님께 여쭤본 그날은 ‘희년’을 맞이한 새해,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미사가 있는 날이었다. 보통은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바로 돌아가는데, 그날엔 왠지 조금 더 머물고 싶어 성당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시켜두고 주보를 보고 있었다.


확실히 반년 가량 성당에 다니며, 나는 몸도 마음도 건강해짐을 느꼈다. 그 기색은 누군가 보아주기 전까지는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이었는데, 수녀님께서 “밝아졌다”고 말씀해 주시니 이 공간에, 그리고 사람들에게 더욱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보통 ‘봉사 단체’들이 성당의 운영과 지역사회 공헌을 담당하지만, 나는 그 정도는 아니어도 무언가 작은 도움이라도 보태고 싶었다.


“레지오, 성가대, 빈첸시오... 모두 도움이 필요한 단체지만, 내 생각에 미카엘은...”


수녀님은 잘 어울릴 것 같다며 성당 카페를 말씀하셨다. 카페는 비영리로 운영되며, 성당을 찾는 이들을 대상으로 영업하고, 수익은 전액 불우이웃을 위해 기부된다고 했다. 카페는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었고, 개인적으로 커피를 배운 적도 있어 끌렸다. 그렇게 카페에서 봉사를 하게 됐다.


그리고 이 예쁜 카페를 처음 만들고, 초대 회장을 맡았으며, 지금은 카페지기로 일하며 여러 봉사 살림을 주도적으로 챙기고 돌보는 이가 ‘로사’라는 것도 알게 됐다.


로사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리마의 성녀 로사(Rosa)는, 장미가 상징인 가톨릭 성녀 중 한 사람이다. 그런 세례명을 유아 때 받았다는 그녀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던 첫 만남에서 자신의 병력을 이야기했다.


“저, 머리 좀 짧죠? 얼마 전까지 항암치료하고 회복 중이거든요. 머리가 이제 다시 자라고 있어서 그래요.”


내심 놀랐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사실 그녀가 앓았던 병력보다는, ‘암’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너무도 담담하게 일면식도 없던 이에게 털어놓는 태도에 더 놀랐다. 혹시— 내게 암이 그리 어색하지 않은 주제라는 걸, 느낌으로라도 알아챘던 걸까? ‘이 사람, 참 티 없이 맑고 솔직하다.’ 그렇게 느꼈다.


로사는, 밝기로 치자면 촛불을 많이 켜둔 실내의 밝음이었다. 원래는 내향적이지만 친절이 편하고, 다른 이의 불편함은 그 이상으로 불편해하는 성향. 작은 체구에 단정한 짧은 머리, 가끔 커다란 안경을 쓴 모습이 모범생 소녀 같은 인상이었고, 배려 넘치는 말투는 그와는 또 다른, 성숙한 분위기의 다른 매력이었다.


“그런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디가 아팠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제가 너무 TMI였죠? 머리 짧은 걸 좀 의아하게 생각하실 것 같아서... 저는 혈액암*이었어요. 림프종*이요.”


로사는 서슴지 않고 자신의 병력을 소개했다. 처음 보는 이에게 쉽게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그저 상대가 찜찜한 기분이 들지 않도록 솔직하게 다 이야기하는 게 편한 성격 때문이라고 했다.


림프종


“한 1년쯤 전이었어요. 목과 겨드랑이 같은 곳에 멍울이 만져지더니, 금세 몸 곳곳에서도 만져지는 거예요. 병원에 가서 진료를 보고, 조직검사*를 해야 한다 해서 했죠. 검사 결과는 악성 림프종. 진행 속도가 무척 빨라서, 서둘러 항암을 시작해야 했어요.”


젊은이와 노인,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는 혈액암은 완치가 어렵다고 알고 있었다.


“기존 약제로는 완치율이 낮다고 했어요. 재발률이 높기 때문이라는데... 저는 다행히 교수님 소개로 임상*에 참여할 기회가 생겼고, 재발률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새로운 약제로 항암을 하게 됐어요.”


로사는 한 번 병원을 옮겼다고 했다. 이전 병원에서 조직검사까지 마쳤지만, 혈액암으로 유명한 성모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어디에 있는 성모병원이냐고 묻자, 반포에 있는 ‘서울 성모병원’이라고 말했다.


“묘하네요. 저도 서울 성모병원에서 치료했거든요.”


이로부터 우리는 두 가지 공감대를 갖게 됐다. 하나는, 죽을지도 모를 큰 병을 겪었다는 것. 두 번째는, 치료받은 병원이 같았다는 것.


“이제는 괜찮아요. 성당 분들도 많이 걱정해 주시고, 다행히 약도 잘 들어서 완전관해* 했거든요. 지금은 머리도 길고, 체력도 키우고 있어요. 미카엘 님은 운동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언제 다 같이 산에 가요.”


불완전 완치


지난 아픔을 다 이해하는 이로서, 참 당당하고 멋져 보였다. 같은 병종을 앓았던 사람으로서, 그 치료 과정이 단지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의 암에 맞서 보이지 않는 무기로 싸우는 일은, 그 결과를 확신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점에서 참 힘겨운 시간이다. 몸이 생각을 강하게 지배하는 이들에게는 무너져 내리기 쉬운 출렁다리가 이어진 고행길과도 같으니까. 그래서 이제 막 세상으로 나와 어떻게든 다시 살아갈 힘을 기르고자 한다는 그녀가 참 멋져 보였다.


‘한껏 찬 겨울 버티고 버텨 틔운 싹 무더기, 서로서로 받치고 디뎌 다시 우뚝 선 새 생명의 올-곧음이여.’


“처음에는 왜 내게 이런 시련이 생겼나 싶었는데, 이제는 성당에서 봉사하고, 많은 이들을 위해 도움이 되는 삶을 살려고 해요.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삶을 살게 하신 데 다 뜻이 있으셨다, 싶어서요.”


그녀는 이미 완치의 길을 걷고 있었다. 나에 비하면, 그랬다. 나는 이런 배움, 깨달음, 잘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다시 채워진 그녀의 머리카락만큼도 자라나지 못한 채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어렵게 새 삶을 얻고도, 어쩌면… 불완전한 완치였던 것일까.



용어 해설

혈액암 (Hematologic cancer / 혈액암종): 혈액, 골수, 림프계 등에 생기는 암을 통틀어 혈액암이라 부름. 백혈병(Leukemia), 림프종(Lymphoma), 다발골수종(Multiple myeloma) 등이 대표적. '고형암(위암, 폐암 등)'과 구분.

림프종 (Lymphoma): 면역계를 이루는 ‘림프구’가 암세포로 변해 생기는 혈액암. 림프절(멍울), 비장, 골수 등에서 자랄 수 있음. 진행이 빠른 경우도 많아, 진단 즉시 치료가 필요함.

조직검사: 병이 의심되는 부위의 조직을 떼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검사. 암인지 아닌지를 확진하고, 치료 방향을 정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검사.

완전관해 (Complete Remission, CR): 치료를 받은 뒤 검사에서 암세포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상태를 말함. 일정 기간 재발 없이 지내면 판정하는 완치(Cure)와는 구분됨.

임상시험 (Clinical Trial, CT): 새로운 약이나 치료법이 실제 환자에게 얼마나 효과적이고 안전한지 시험하는 과정. 승인된 단계별(1상~4상) 과정을 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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