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다시, 시작하는 그대에게
로사에게
''암'이라는 걸 처음 발견했을 때 나는 아직 어렸어요. 조직검사 결과를 전한 병원의 전화를 받은 뒤, 한동안은 조금 멍한 기분이었지요. 치료를 시작하기 전 며칠은, 그냥 별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도 같아요. 시간이 좀 더 지나자 두려움이 밀려왔어요. 어떤 날은 원망을, 또 여러 날은 체념을, 자주 현실 부정이나 도피의 마음에 사로잡혀 지냈어요. 하지만 결국, 길은 하나뿐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마치 오랜 가뭄 중인 메마른 땅을 건너는 듯한 그 길은—그저 마련된 목마에 내 몸을 맡기고 건넌, 치유의 길이었어요.
많은 도움이 있었어요. 놀랍고 황망한 상황 속에서도 애써 침착하게 나를 돌봐준 어머니, 아침마다 예정된 치료와 항암에 늘 동행하던 아버지, 감사하게 마련된 여러 조력들, 오랜 경험의 의사 선생님들, 새벽마다 혈압을 재던 부지런한 간호사님들, 그 밖에도, 나의 치유를 진심으로 바라고 응원해 준 고마운 이들이 있었어요. 그 길의 시작에는 병을 찾아낸 아주 큰 행운과, 치료 방법이라는 필연이 있었어요. 그뿐이었어요.
나중에 사람들이 나를 추켜세우며 말한 ‘내 용기, 내 힘’은 사실 거기 없었어요. 나는 의연하지도 않았고, 당당하지도 못했어요. 두렵고 아팠어요. 억지로라도 병원에 가야 했기에 갔고, 꼭 해야 한다기에 주사를 맞고, 커다랗고 시끄러운 기계 속으로 들어갔어요. 스스로의 의지로 한 일은, 별로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병이 나았어요.
나는 그것이 나의 노력과 의지의 보상이라고 믿었어요. 어찌 보면 오만이었고, 달리 보면 자만이었어요. 이후에 몸을 소중히 하지 않았어요. 나태하고 게으른, 일상을 살았죠.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내가 새 삶을 얻은 것은 전부, 신의 배려였다는 걸요. 지금까지 별 일 없이 지내는 건, 큰 행운이라는 것을요. 치유의 시간 동안, 나를 아끼는, 사랑하는 사람들은 병원의 빛이 어색할 만큼 깊은, 암흑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는 것을요. 자주 외롭다고 착각한 나는, 정작 많은 외로운 싸움중인 이들과 풍요의 동행 중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생각해요. 치유는 곧 ‘사랑’이고, 치유의 길은 사랑을 ‘발견하는 길’이라고요.
길 위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내가 새 생명을 얻고 다시 태어날 수 있게 해 준 모든 이들의 은혜와, 그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에요. 몸과 마음이 모두 무언가 잃었던 것을 되찾는 과정이었죠. 나를 치유의 길, 새 삶의 길로 이끌어주신 신의 은혜와, 그 길에서 발견한 모든 사랑에 감사해요. 그리고 당신—끝내 당신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짓고, 써 내려갈 수 있음에, 감사해요.
당신은 그때의 나와 달라요. 감사할 줄 알고, 사랑할 줄 알고, 겸손한 믿음을 품었어요. 따뜻한 눈물을 가득 품었고, 그걸 지킬 만큼 단단해요. 그런데도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한 없이 자애롭죠. 그래서 나는 믿어요. 그 시절 나보다 더 올곧은 당신은, 더 잘 이겨내리란 것을요. 나약했던 내게도 주셨던 그 은총을, 당신에게 라면 더 아낌없이 꼭 내리시리란 것을요. 내게 허락하신 치유의 길 끝에 우리 두 사람을 만나게 하신 것도, 동행이란 선물을 주신 거라고요.
혼자가 아니에요. 당신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 가운데, 그중 가장 가까운 곳에 내가 있을게요. 우리가 함께 걷는 이 길 어딘가에는 분명 오르기 힘겨운 언덕도 있겠지요. 하지만 잠시 멈춰 서로를 바라보고, 조용히 숨을 고르다 보면 다시 오를 힘이 생길 거예요. 그리고 결국 닿게 될 거예요. 길을 가린 자욱해진 안개가 사실은 구름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만나게 되는 하늘과 가장 가까운 새 생명의 땅에.
다시 시작된 길에 선 그대, 내가 손을 잡아 줄게요. 천천히, 묵묵히, 포기하지 않고, 우리 한 번 끝까지 걸어가 봐요. 그리고 그 고통의 시간 속, 걷는 걸음마다 스며드는 행복한 기억의 조각들과, 곁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과, 당신 안에 있는 믿음이 등을 살짝 밀어주고, 다시 일으켜 세워 주기를 바라요.
언제나의 밤에는 편히 쉬고, 다음 날 아침엔 커튼 사이로 스며든 빛이 은혜롭게 당신의 얼굴을 비추어, 편안히 눈을 뜰 수 있기를.
사랑해요. 온 마음을 다해.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이사야 53,2)"'
로사의 고백
"과거 혈액암을 진단받았습니다. 상황은 심각했고, 완치율은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제대로 사랑도 못 해보고 이렇게 죽는 건가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극적으로 임상 중인 약제를 만났습니다. 약은 효과가 있었고, 치료는 순조롭게 이어졌습니다. 약 반년 뒤에는 몸에서 암세포가 모두 사라졌습니다. 빠졌던 머리카락도 다시 자라났습니다. 회복을 기뻐할 무렵, 감사한 사랑도 그 시기에 만났습니다. 지난 시간의 보상 같았습니다. 오랜 가뭄 끝에 찾아온 단비처럼, 행복이 가슴 가득 밀려왔습니다. 이제야 봄이구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설레는 미래를 그릴 무렵, 남자친구의 부모님을 만날 일정을 앞두고, 큰 걱정 하지 않던 정기 검사에서 암이 재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심지어 위치도 좋지 않았습니다. 극히 드물게 나타나는, CNS(뇌) 재발이었습니다.
희망은 다시 사그라들었고, 절망은 짙게 번졌습니다. 치료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쓸 수 있는 약제도 많지 않다고, 선생님은 계속 무서운 이야기만 했습니다. 몇 개 없는 선택에, 서둘러 고용량의 항암제를 투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조혈모 세포 이식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치료 효과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의지의 불꽃을 점점 약하게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예전과 달랐습니다. 어떻게든 살고 싶었습니다. 헤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고, 지키고 싶은 행복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은 나의 의지가 되었고, 버틸 수 있는 희망이 되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저는 그 길 끝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께 죄송스럽지만, 원망하는 마음도 듭니다. 웃는 척도 이제는, 못 하겠습니다.
결국, 퇴근하고 병원에 달려온 그를 보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