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를 품은 장미 #2 - PET-CT
누군가에겐 선물이고 누군가에겐 '사랑의 매'를 부르던 종이 쪼가리. 성적표는, 그것을 받는 이의 처지와는 상관없이 늘 보편적인 불확실성을 갖는다. 환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치료 전에는 제발 별일 아니기를 바라며 하고, 치료 중에는 이번 약이 효과가 있기를 바라며 하는 검사의 결과지. 환자에게는 그게 성적표다. 적절한 치료, 주위의 도움, 스스로의 노력 모두 영향을 미치지만, 결국 하늘이 정하는 그 결과에 대한.
특히 암 환자들은 수시로 검사를 받는다. 확진 전엔 CT나 MRI처럼 눈에 보이는 영상 검사를 하고,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조직 일부를 떼어내 특성을 파악하는 '조직검사'를 한다. 치료 중에는 약물의 반응을 확인하거나, 수술 후 재발 여부를 보기 위해 중간 경과 검사를 거친다.
검사 하나하나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절차로 진행되지만, 그 사이의 시간은 환자와 곁에 있는 이들의 간절한 기도와 바람으로 채워진다.
중간 검사
그리고, '완전관해'. 몸속 암세포가 모두 사라졌다는 의사의 판정인 완전관해는 암 환자에게 최상의 중간 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므로, 환자는 바란다. 제발 암세포가 다시 생기지 않기를. 검사 일주일 후 담당 선생님 외래를 가며, 기대 보단 간절함을 잔뜩 품는 이유다.
“생각보다 암세포가 빠르게 사라졌어요. 몸 여기저기 울룩불룩했던 곳들도 다 들어갔고요. 한 번의 항암으로도 효과가 컸고, 여덟 번의 항암이 끝났을 땐, 몸에 암세포가 하나도 없다는 완전관해 판정을 받았어요.”
림프종 치료가 생각보다 잘 끝났다는 말을 전하는 로사의 표정은 밝았다. 얼굴엔 그늘이 없었다. 머리가 길지 않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가발을 쓰거나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던 그녀. 늘 어딘가 어두워 보이던 표정이 그날만큼은 맑았다.
“글에서 봤어요. 얼마나 아팠던 거예요?”
내 글의 애독자답게 로사는 나의 지난 일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주로 삶의 곳곳에서 소재를 캐는 에세이 작가에게 글은, 미궁을 걸으며 뿌린 단서가 될 과자 조각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되짚어가다 보면 무엇이 나올까? 거울의 방? 우물? 아니면, 나무 의자 하나 덩그러니 놓인 '진실의 방'? 이번 과자 조각의 끝에는, 병실이 있었다.
“저는 비인강암이었어요. 코와 목 사이, 그 중간 어딘가에 종양이 생겼었죠. 위치는 머리 한가운데여서 수술은 어려웠고, 방사선 치료랑 항암을 함께 했어요. 림프절 두 곳에 전이됐고, 뇌 쪽까지 침범 직전이라 상황이 많이 안 좋았었어요.”
로사는 말없이 듣고 있더니, 잠시 시선을 내려두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부모님께서 많이 놀라고, 슬퍼하셨겠어요.”
눈물의 흔적
부모님. 아버지, 어머니. 외국에서 혼자 취업해 홀로 선 아들을 늘 자랑스러워하셨던 그때의 일이었다. 서른도 안 된 젊은 나이에 한창 일도 익히고, 기술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성장하던 시기에 갑자기 아프다며 귀국한 아들을 처음에는 크게 걱정하지 않으셨었다. 그런데, 몇 번의 검사 후 병원의 진단을 듣고 난 후, 말을 잇지 못하던 두 분의 표정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한 동안 말씀이 없으시다가, 아버지는 안아주셨고, 어머니는 의외로 담담하셨다. 하지만 언젠가, 안방에 들렀다가 발견한 어머니의 공책. 공책에 빼곡히 적힌 암 환자를 위한 레시피 글과, 곳곳에 번진 잉크의 흔적이 어머니가 방에서 몰래 우셨다고 말해주었다.
“PET-CT도 경험 있으시죠?”
“네. 치료 전과 중간, 그리고 다 끝나고 한 번 더. 딱 성적표 같았어요. 반 배치고사, 중간고사, 기말고사 느낌? 아무튼 결과 기다리는 동안엔 좀 떨렸던 것 같아요. 미세한 암세포 하나만 남아 있어도, 빛이 날 테니까요.”
PET-CT는 암세포처럼 대사가 활발한 세포에 조영물질이 모이고, 그 주위가 화면에서 밝게 빛나게 되는 원리를 이용한 검사다. 그 빛은 세상에서 가장 미움 받는 빛이자, 치유의 빛이다. 어쩌면, 악마 루시퍼(Lucifer)의 이중성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로사는 사진 두 장을 보여줬다. 전신 곳곳이 밝게 빛나던 사진 한 장. 그리고, 아무 음영도 보이지 않는 깨끗한 사진 한 장.
“정말 후련하셨겠어요. 이렇게나 드라마틱한 효과라니...!”
사진을 보여주는 그녀의 얼굴에는 아주 조심스러운 승리자의 표정이 살짝 머물러 있었다.
“이제 다음 달에 다시 PET-CT 찍어요. 그런데 조금 걱정돼요.”
“왜요? 결과가 나쁠까 봐요?”
로사는 항암 중에도 체력을 유지하려고 애썼다고 했다. 아침저녁으로 호수공원을 걸었고, 성당에서도 빠짐없이 봉사를 했다. 암 전문 교수 한 분이 하신 “완치에는 착한 마음이 도움이 된다”는 말씀의 라이브 사례. 늘 남을 돕는 삶을 산 로사의 완치를, 주위의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로사의 말은 뜻밖이었다.
“아니요, 제가 주사를 잘 못 맞아요. 혈관이 약해서 쉽게 터지거든요. 경험 많은 간호사님들도 제 팔에 주사 바늘을 꽂는 걸 어려워하세요.”
로사는 팔을 살짝 걷어 보여주며 말했다. 항암을 할 때도, 최근 전공의 파업 때문에 케모포트를 식립 할 의사가 부족해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듣고 그냥 주사로 맞겠다고 했단다.
“그게 가능해요? 항암제는 독해서 중심정맥으로 이어지는 케모포트를 통해야 안전하다고 들었는데...”
“병원에서도 걱정하긴 했어요. 그래도 불가능한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저는 결국 일반 혈관으로 항암을 다 맞았어요. 혈관이 많이 손상됐고, 나중엔 손목, 손등, 심지어 발등까지 찾아가며 맞았죠. 그 과정이 참... 힘들었어요.”
PET-CT는 검사 도중 조영제를 넣어야 해서 검사 전에 미리 정맥주사를 꽂는다. 보통 손목이나 손등 쪽 혈관을 쓰는데, 그마저도 요즘은 잘 찾기 어렵다는 로사의 얼굴엔 반쯤 걱정이 얹혀 있었다.
“우리, 공통점이 많네요. 이런 대화가 자연스럽게 된다는 것도 신기하고요.”
“그러게요. 아팠던 시기도, 병명도 다르지만 크게 보면 같은 병을 앓았던 사람들이니까요. 게다가 병원도 같고요.”
두 가지 딜레마
아픈 이를 대하는 아팠던 사람은 두 가지 딜레마가 늘 어렵다. 공감을 쉽게 하면서도 그게 섣부른 판단이거나 오해일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위로와 응원 피로도'다. 아는 상식에서 하는 바른 이야기도 잔소리가 될 수 있다. 그러니 가장 편한건, 줄인 말 끝에 하는 그의 쾌유를 바란 마음 속 깊은 '기도'다.
‘그동안 잘해 왔고, 앞으로도 선한 마음으로 잘 살아갈 사람입니다. 더는 넘어지지 않게, 좋은 길로 인도하소서.’
검사를 앞둔 그녀를 위한, 기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