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으로 본 사랑과 건축
사랑이 이루어지는 시간은 찰나와도 같은 순간이지만 빙산의 일각처럼 그 아래는 오랜 시간의 축적과 기다림이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다. 여기 사랑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고 보고 싶지만 끊기는 화면을 통해서만 닿을 수 있는 두 남녀에 관한 영화가 있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두 주인공인 노라(그레타 리)와 해성(유태오)은 어린 시절 동네에서 함께 자라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그러나 미처 애틋함을 알아갈 나이가 되기도 전에 미국으로 이민 가는 노라로 인해 둘은 자연스레 삶이라는 갈림길에서 다른 방향을 택하게 된다. 뉴욕에 살며 극작가를 꿈꾸는 노라와 대학생이 된 해성은 12년 만에 화상 통화로 서로를 만나지만 기술의 발달이 무색할 만큼 둘 사이의 만남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영화는 만남보다는 기다림, 대화보다는 침묵 어딘가에서 둘의 관계를 비춘다. 그들에게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은 마치 겁(劫)의 시간과도 같아서 억척스럽게 질기고 끝도 없이 긴 인연 끝에 얻어진 작은 부산물이다.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는 많지만 그 모습이 자칫 과장되거나 혹은 부감으로 촬영되어 단지 높은 마천루 끝에 앵글이 걸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곳이 뉴욕이라는 것을 확실히 되뇔 수 있으나 굴곡 없이 평평해져버린 길에는 이야기의 강물이 고이기는 힘들다. 그런 면에서 <패스트 라이브즈>는 뉴욕 곳곳을 비교적 덤덤하게 촬영하면서도 뉴욕에 살고 있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도시를 두 주인공만큼이나 매력적으로 소개한다.
메디슨 스퀘어 파크에서 만나서 페리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며 보이는 풍경은 브루클린에 위치한 덤보 (Dumbo)에 다다른다. 영화 포스터에 쓰이기도 했고 둘이 앉아서 얘기를 나누는 장면이 배경이 되는 곳은 Jane’s Carousel, 우리 말로 하면 ‘제인의 회전목마’다. 뉴욕의 많은 장소 중에서 하필 이곳에 앉아 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단순하게 배경이 예뻐서가 아닌 감독의 의도된 연출임이 분명하다. 서로를 향해 돌고 돌지만 고정된 채 끝내 다가갈 수 없는 회전목마처럼 둘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고 맴돈다. 여기에 반복과 회귀라는 수사가 더해지면 두 사람의 관계와 회전목마 모두를 적절히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Jane’s Carousel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제인의 회전목마다. 근데 왜 하필 뜬금없이 놀이공원이 아닌 도심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고, 동화 제목으로나 쓰일법한 독특한 이름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엠파이어 풀턴 페리 스테이트 파크 (Empire Fulton Ferry State Park)의 디벨로퍼로 일하던 대이비드 월렌타스는 (David Walentas) 1983년 이 공원을 정비하는 사업을 진행할 때에 회전목마를 넣는 계획안을 제안했고 1984년 경매를 통해 문 닫게 된 놀이공원에서 오래된 회전 목마를 구매하게 된다. 이후 그의 아내인 제인 월렌타스는 (Jane Walentas) 수작업으로 표면을 벗겨내고 덧칠하는 과정을 통해 빛바랜 말들에게 새 숨결을 선물했다. 약 22년간의 긴 시간 동안 최초 회전 목마 사진과의 대조 작업을 통해 최대한 원래의 모습 그대로 복원을 하게 되었다. 이후 2011년 9월 현재의 위치에 회전목마가 들어서고 운영을 시작했다.
엉겁의 시간만큼은 아니더라도 긴 기다림 끝에 회전목마가 대중에게 공개되었을 때 한 가지 흥미로웠던 점은 회전목마를 둘러싸고 있는 박스 형태의 건물이었다. 회전목마를 감싸안고 있는 이 건물은 프리츠커 상 수상자인 프랑스 출신의 건축가 장 누벨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장 누벨은 우리나라에서도 리움 미술관 중 하나를 맡아 설계를 담당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장 누벨은 놀이공원에서 마치 뛰쳐 나온 것처럼 보이는 형형 색색의 생동감 넘치는 말들을 차분하고 단순한 디자인의 박스에 담았다. 건물 자체 보다 회전목마에 눈길이 보다 더 갈 수 있도록 한 배려이면서도 기능적, 심미적 가치를 놓치지 않으려 하는 의도가 들어가 있다. 건물은 습기에 취약한 나무로 된 말들을 보호하기 위해 회전목마 전체를 감싸는 형태를 취하고 있고 여기에 유리와 스틸의 사용을 통해 커튼처럼 건물을 개폐하여 강변을 향한 탁 트인 개방감을 제공하였다. 낮에는 마치 서커스의 막이 오르듯 파사드를 커튼처럼 접어 가리지 않는 시야를 제공하고 밤에는 그 자체로 빛나는 박스가 되어 브루클린의 밤을 밝게 비춘다. 회전목마를 타고 있으면 맨해튼의 풍경이 한눈에 보였다가 금세 공원과 주변 건물로 이어진다. 순환하는 풍경의 연결 고리는 작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잠시나마 무한한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준다.
세월의 흔적을 잊히게 만드는 것이 아닌 그것을 함께 가지고 가면서 시간의 겹을 쌓아가는 형태의 보존은 노라와 해성의 사랑뿐만이 아닌 건축에서도 즐겨 쓰이는 주제이다. 옛것을 그대로 버리지 않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건축을 바라 보는 관점의 변화와 그것을 이루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실천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옛것에 새 생명을 불어 넣고 현대적인 감각을 통해 건물을 재탄생시키는 것은 인연의 시간만큼 길고 지난하겠지만 이를 통해 쌓이는 세월의 덧씌워짐은 제아무리 멋들어지게 지어진 새 건축물이라도 비견될 바가 못된다. 시간은 하류의 퇴적물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쌓이며 건축물로 하여금 이야깃거리를 더 풍성하게 만든다.
영화 속 노라와 해성의 사랑은 비록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자체로 실존했었다. 둘이 다시 만나게 된 것 역시 오랜 기다림이 마치 전제조건인 것 마냥 필요로 했을 것이다. 모든 사랑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랑은 반드시 기다림을 필요로 하다. 또 그 사랑이 결국 우리가 말하는 흔한 결말인 연인이나 결혼으로까지 발전되는 것만을 말하는 것도 아닐 터이다. 설사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함께 했었던 시간은 그 자체로도 나를, 그리고 관계를 만들어 낸다. Jane’s Carousel의 회전목마도 오랜 기다림 끝에 제인과 장 누벨이라는 사람과 인연이 되어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됐다. 만들어진 지 100년이 넘는 이 회전목마는 지금도 브루클린에서 사람들을 맞이하고 누군가에게 멋진 풍경을 제공하고 있다. 쌓여가는 시간의 깊이와 그 소중함을 이해할 수 있다면 회전목마에서 보이는 뉴욕 역시 조금 다르게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