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평소와 같이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잠을 자고 나면 어제의 화가 좀 수 그러 들 줄 알았는데 잠들기 전 감정이 상한 그대로 남아 있는 듯했다. 아내는 아이 아침 식사 준비에 분주해 보였다. 나는 출근길에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주는데 아이와 함께 집 밖을 나설 때까지 나는 아내에게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정적이 흐르는 분위기 속 현관문을 여는 찰나 아내가 한 마디 건넸다.
"계란 떨어졌어. 계란 좀 사 와."
이유야 어떻든 말다툼에 아내 역시 기분이 상했을 텐데 계란을 사 오라는 말을 하는 거 보면 나보다는 기분이 덜 상했나 보다. 나는 가능한 말을 섞고 싶지 않았지만 ‘어’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나는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선 엘리베이터를 향해 앞만 보며 집에서 걸어 나왔다.
회사에 도착해 일을 하면서도 계속 전 날 일이 떠올랐다. 업무에 집중하려 해도 전날 밤 아내의 말과 표정이 자꾸 떠올라 집중할 수가 없었다. 회사가 집 근처여서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점심을 집에 가서 먹는데 점심도 먹지 않았다. 배고픔이 느껴질 때마다 앞으로 집에서는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오후에 휴대폰 카톡 메시지에 진동 소리가 울렸다. 아내였다.
"물도 거의 없어. 물도 사 와야 돼."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전혀 내 마음을 모르는구나.' 지금이라도 내게 사과를 하면 받아 줄 마음이 조금은 있었는데 카톡 메시지를 보니 그냥 강을 건너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겠지만 당분간 아내와는 냉정하게 선을 그어놓고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퇴근 후에도 나는 곧바로 집에 가지 않았다. 가급적 최대한 집에 늦게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퇴근시간이 오후 4시 반인 나라에 근무를 하다 보니 퇴근 후에 시간이 너무 많았다. 귀가시간이 늦어지는 만큼 밖에서 배회해야 하는 시간 역시 길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 정도는 충분히 각오해야 했다. 나는 회사 밖을 나와 우선 갈만한 식당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점심을 굶어 너무 배가 고팠다.
“오늘만큼은 나를 위한 호사를 누려봐야지!”
항상 밖에서 맛있는 것을 먹으면 가족 생각이 먼저 떠오르던 나였다. 그런 내가 오늘은 나만을 위해서 먹고 나만을 위해서 마시겠다는 각오로 분위기 좋은 식당을 찾아 나섰다.
호기롭게 시내 중심가로 향했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앞에 차를 세웠다. 그런데 차 문 밖을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유럽풍의 고풍스러운 레스토랑에서 혼자 고기를 써는 내 모습을 생각하니 호사는커녕 쪽팔리지만 않으면 다행이겠다 싶었다. 한국인들 오는 곳 뻔한데 이런 곳에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곧바로 차 시동을 켜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결국 내가 향한 곳은 집 근처의 생맥주를 파는 식당이었다. (참고로 내가 있는 곳은 술집이나 술을 파는 곳이 별로 없는 나라이다.) 술 파는 곳에서 혼술은 난생처음이라 어색했지만 그래도 이곳에선 혼자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