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원래 가려던 좋은 레스토랑에 가진 못했지만 가끔 방문하는 곳에 오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이 식당에서 종종 혼밥이나 혼술 하는 사람을 봤던 터라 나 혼자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다만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많아 쾌쾌한 담배 연기와 냄새는 좀 거슬렸다. 그 외에는 나무랄 게 없었다. 직원들도 친절했고 허기진 배를 달래기에 음식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나라에서 구하기 힘든 생맥주를 마실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나는 이내 음식과 맥주를 주문했다.
기다리던 500cc 한 잔과 터키식 바비큐가 나왔다. 먼저 맥주를 쭈욱 들이켰다. 역시 빈속에 마시는 맥주의 맛이 일품이었다. 이내 불 향기 가득한 치킨을 입에 넣으니 행복이 따로 없었다. 허기진 배를 달래는 동안 머릿속에 계속 맴돌던 불편한 생각들이 잠시 잊히는 듯했다. 음식과 맥주로 배를 채우며 나름의 소소한 행복을 찾아가고 있던 중 전화 진동음이 울렸다. 아내였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이번엔 카톡 메시지 표시와 함께 진동이 울렸다.
“아빠 어디야? 왜 이렇게 늦게 와?”
아내의 전화기로 아이가 카톡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아마도 전화를 걸었던 것도 아내가 아니고 아이였던 것 같다. 카톡을 확인한 후 회신을 할지 말 지 망설이던 중 또다시 전화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귀가가 늦는 아빠 걱정에 전화와 카톡을 연이어 보내고 있는 아이를 생각하니 순간 짠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민석이니?”
“여보세요. 아빠!, 아빠 왜 집에 안 들어와? 또 술 마셔?”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어색하지 않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아니야. 일이 많아서 오늘부터 계속 집에 늦게 들어갈 것 같아. 아빠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 알았지?”
아이는 내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안심이 됐는지 ‘응, 열심히 해’ 라며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이를 안심시키려 거짓말을 한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고, 한 편 나를 걱정해주는 아이 생각에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하며 순간 여러 감정이 오고 갔다. 아이 생각에 불과 몇 분 거리의 집을 한 걸음에 달려가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혼자 만의 시간을 더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음식과 함께 맥주 500cc 세 잔을 마시니 배가 가득 차올랐다. 더는 마실 수가 없어 배도 꺼칠 겸 잠시 숨을 돌리며 주변을 천천히 살펴봤다. 술집에는 현지인으로 가득했다. 사실 그곳에 있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백인에 가까운 피부색을 하고 있어서 누가 현지인이고 유럽인인지 알 길이 없었다. 확실한 건 식당 안에서 동양인은 나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식당의 실내 풍경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그동안 누군가와 함께 왔던 익숙한 장소였지만 혼자 와서 술을 마신 건 처음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동양인 혼자 술 마시는 모습에 호기심을 느꼈는지 이따금씩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곳에서 나는 ‘이방인’ 이었고, 마치 낯 선 곳을 여행하고 있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취기가 올라와서 느껴진 기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일상에서 벗어난 낯선 행동에 나의 시야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익숙한 생활 곳곳에도 낯선 환경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도…만날 퇴근하면 집에 들어가기 급급했었는데 ‘가끔씩의 의도적 일탈도 나쁘지 않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저녁 10시가 되자 점원이 다가와 가게 문을 곧 닫는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약간 들뜬 마음에 한 잔 더 하고 싶었지만 그 시간 갈 곳도 더는 없었다. 짧았던 일탈을 접고 집에 들어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아내와의 싸움으로 인한 앙금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내 기분은 한 층 가벼워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