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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펙트가 사라진 세상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12

by 김영무
alexander-krivitskiy-awXBjFhh7iw-unsplash.jpg Photo by Alexander Krivitskiy on Unsplash


심리적 기피 인물이라는 정의는 처음 들어봅니다. 그런데 맞네! 정말 그래! 무릎을 탁 치는 설명입니다. 저 또한 시진핑 주석에 대해 작가와 동일한 감정이거든요. 그의 모습이 뉴스에 나오면 바로 채널을 돌리는 편이죠. 중국 전대에 대한 뉴스는 읽어도 시 주석의 사진이나 기사는 바로 넘깁니다.


어쩌면 사드 보복 사태라든가, 중국이 얼마나 집요하고 치사한 국제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소식을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의 고위 공무원이나 정치인, 기업의 대표들도 그런 시진핑식 표정을 짓는 경우가 너무 많다고 설명합니다.


읽고 나니 그런 것 같아요. 대화하고 있는 상대방에 대한 그 어떤 존중의 단서도 발견되지 않는 표정. 무표정에 가깝지만 상대를 무시하는 눈빛. 아무 정서적인 단서도 제시하지 않는 시진핑식 무표정.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이따위 표정으로 구현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상호 인정이라는 상호 주관적 틀에서만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헤겔의 주장은 의미심장합니다. 근대 시민 사회의 법과 규칙들이 생기면서 생존 투쟁에서 인정 투쟁으로 변화시켰다는 거죠. 화나는 대로 물리적인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큼 상대의 인정을 받는 것인가에 대한 투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무시당하는 것처럼 세상에 기분 나쁜 일은 없는 것이라 합니다. 내 존재 자체를 통째로 부정당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거죠. 당연히 분노할 일이고, 충분히 저항할 일입니다. 갑질, 무시, 모멸감 같은 사회심리학적 담론이 훨씬 중요하게 대두된 이유도 그렇기 때문이라 합니다.


먹고사니즘이 거의 해결된 시점에 이른 요즘, 당연하게도 인정 욕구, 인정 투쟁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겁니다. 소셜 미디어의 좋아요 버튼은 인정 투쟁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으며, 사람의 도파민 중독을 강력하게 추구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버튼에 목을 매고 있습니다.


저만의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서구의 사회보다 한국 사회에서 좋아요를 클릭하는데 더 보수적인 것 같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인정하는데 나에게 아무런 보상이 없는 좋아요를 클릭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상대방의 노력과 수고에 좋아요를 클릭해 주는 것을 아까워하는 걸까요?


서구 사회에서는 감탄사를 마구 남용하죠. wonderful!, awesome!, really? 아주 긍정적인 그들의 문화이고 나는 당신을 리스펙트 한다는 상호 인정 규칙의 실천입니다. 습관 같은 말인 줄 알면서도 서로 인정받는 느낌에 기분이 좋아집니다. 한국 사회에서 대화할 때는 공감의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실제로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 있는 사람이라면 경청의 눈빛과 표정으로, 미소로 화답하며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무표정의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많죠. 무표정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표정입니다. 대화 도중에 상대는 분노가 치밀어 오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이제 스스로의 표정에 민감해지길 원합니다. 상대방에게 미소로 화답하고, 그렇구나! 멋진데요! 감탄사를 좀 날려주고. 대화를 할 때 절대 먼산 바라보지 않고. 눈을 마주치면서. 대응을 준비하며 듣지 말고. 순수히 적극적인 경청의 자세로 대화를 나눈다면 하루종일 행복할 거 같습니다.


오늘의 질문: 오늘 당신과 대화를 나눈 상대방에게 어떤 표정을 지었나요?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당신도 그러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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