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직장 생활을 했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년 단위의 목표를 가지고 연말 평가를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명함, 직책, 그리고 그에 따라오는 '일'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나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훈장처럼 느껴지기도 했지요.
나의 나이는 곧 나의 경력이었고, 나의 성취였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그 훈장을 내려놓고, 질문에 대한 답이 오롯이 '나' 자신으로 채워져야 할 때가 되면 문득 말이 막힙니다. 더 이상 과거의 성공에만 기대어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27살, 푸른 열정이 가득했던 그 시절, 나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벤처기업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온몸을 던져 부딪히고 깨지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밤낮없이 매달려 수많은 업무 프로세스를 정의하고 문서 양식을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Kevin'이라는 이름이 문서 양식에 남겨져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해외영업. 해외 마케팅. 국내 마케팅. 해외 전시회. 국내 전시회. 바이어 미팅. 벤더 미팅. 해외 구매협상. 각종 세계 인증. OEM. 품질평가. 광고. 홍보. 매뉴얼을 비롯한 모든 기술문서 작성까지. 직접 물건을 만드는 것 외에는 거의 모든 일을 다 했었습니다.
그 시절의 나는 회사와 함께 숨 쉬고, 회사의 성장이 나의 성장이라고 믿었지요. 두 개의 벤처기업을 상장회사로 키워내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은, 젊은 날의 치열했던 삶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전혀 후회하지 않는 시절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 시절은 지나갔습니다. 거칠게 질주하던 트럭이 멈춰 서고, 나는 새로운 풍경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세 아이의 아빠로서, 장애를 가진 자녀를 매일 등하교시키고, 가족의 편안함을 위해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현재의 삶. 더 이상 '사회적 성취'라 불릴 만한 빛나는 타이틀은 없지만, 이 소소하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나는 또 다른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오히려 나는 스스로를 칭찬하고 격려할 만한 새로운 성취들을 꾸준히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매일 5일간 이어지는 러닝은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죠. 또한, 수많은 시작과 좌절 끝에 포기했던 글쓰기도 이제는 600개가 넘는 글이 쌓인 하나의 숲이 되었습니다.
숲을 거닐며 나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이어주고, 미래의 나를 그려봅니다. 돈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작은 성취들은 나에게 '나'라는 존재가 여전히 성장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알려줍니다.
하지만 나는 과거의 성취와는 또 다른, 돈으로 치환될 수 있는 가치를 창출하는 일에 미련을 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그저 나의 작은 재능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아름다운 쓰임이 되기를 바라는 지도 모릅니다. 나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만족할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를 계속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삶을 엮어 새로운 길을 모색해 보는 건 어떨까요? 예를 들어, 소상공인들을 위한 해외 시장 진출 컨설팅이나 기술 문서 작성 대행 서비스를 제공할 수도 있겠죠. 이는 과거의 내가 그러했듯, 누군가의 성장을 돕는 일이 될 겁니다.
또는, 현재의 나의 삶 속에서 의미 있는 가치를 발견하는 것도 멋질 것 같아요. 세 아이의 아빠로서, 특히 장애를 가진 자녀를 돌보는 경험을 바탕으로 '장애 자녀 양육'에 대한 블로그나 책을 쓰거나,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한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지금 성취해야 할 거리들을 찾고 있는 거 같아요. 아직 이런 것들에 대한 애정은 없어서 추구하고 있지는 않지만요.
물론 현재의 가정을 돌보는 역할에 불편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외부에 보일 어떤 성취를 찾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나 자신에게 스스로 자랑할, 칭찬할 성취를 찾고 있는 거죠.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가장 아름다운 일. 그중에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새로운 성취는 반드시 과거의 성취보다 더 크고 화려해야 하는 것은 아니죠. 멈춰 서서 나 자신을 돌보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모든 과정이 곧 성취입니다. 러닝과 글쓰기에서 이미 경험했듯이, 시작은 미약할지라도 그 꾸준함이 모이면 결국 거대한 숲을 이룰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의 질문: 당신은 지금 어떤 성취를 위해 뛰고 계신가요?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당신도 그러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