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5) 회색분자가 아니라 중용

- 선택할 때는 능동적이고 심사숙고하며

by 케빈은마흔여덟

[그게 무엇이든 가장 나다운 삶을 선택해 행복하게 살아도 괜찮다. 단 한 번 밖에 없는 당신의 인생이니까. 눈을 감았다 뜨면 오늘이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이 바로 특별한 선물이니까. 감사하고, 용서하고, 이해하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며 살고 싶은 대로 살아 보자.

-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괜찮아/ 윤정은]


“넌 회색분자냐”사회 초년 시절, 선배에게 들었던 말이다. 갓 입사한 나는 의견을 내기보다 분위기를 살피며 지내는 것이 더 맞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미 탁월한 재능을 겸비한 상태로 입사한 직원이나,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아는 직원도 있다. 또는 일단 질러 보고 아니면 말고 식의 직원이라면 자신의 의견을 서슴없이 내놓기도 하겠지만 난 해당 사항이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회색분자냐는 말도 당시에는 딱히 반박하고 싶지는 않다.


나서는 걸 유독 싫어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겼었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는 내내 뜨뜻미지근한 태도가 괜찮은 것일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선택을 강요받기도 하고, 강요하기도 한다. 어릴 적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같은 질문에서부터, 학창 시절엔 객관식 문제를 풀며 선택하는 훈련을 해왔다.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와서도 여전히 선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모든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다.


때로는 김 과장이 만든 A안과 이 차장의 B안 중 하나를 고르라는 회의의 압박을 받거나, 승진을 위해 박 상무와 최 전무 중 누군가의 편에 서야 한다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선택이 간단하지는 않다. 잘못된 선택은 치명적일 수 있기에, 나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게도 기준은 있었다.

정치적 질문이라면 진보를 선호하지만, 사안에 따라 합리적인 선택을 중시한다. 회의 안건에서는 결과뿐 아니라 노력의 과정을 본다. 승진 역시 중요하지만, 누구의 편에 서서 잃을 것이 많다면 그 선택은 하지 않는다. 나는 단순히 A와 B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가치를 따져보고 마음이 편안한 결론을 내리고 싶었다. 그런데 결과가 회색이었을 뿐이다


이런 태도를 두고 ‘회색분자’라고 평가받는다면 그 말 자체가 적절한지 따져보고 싶었다. 그러다 우연히 접한 영상에서 ‘중용’이라는 철학 개념을 알게 되었고, 내 선택의 방식이 중용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용 : 동양 철학의 기본 개념으로 사서의 하나인 ≪중용≫에서 말하는 도덕론.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도리에 맞는 것이 ‘중(中)’이며, 평상적이고 불변적인 것이 ‘용(庸)’이다


중용은 고대 중국 철학, 특히 유교 사상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극단을 피하고 균형을 유지하라는 덕목이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음"을 의미하며, 모든 상황에서 적절하고 바람직한 결정을 내리는 길을 제시한다.


중용을 알아보자고 유학을 공부하거나, 관련 서적을 읽어 보기엔 어렵고 양이 너무 많다. 대부분의 철학적 용어들이 그렇듯 애매하면서도, 어려운 말들이다. 정리하자면, 소비관리에서 중용은 과도한 소비와 인색한 절약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을 의미하고 인간관계에서는 지나치게 간섭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은 적당한 소통과 배려를 실천하는 것이 중용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쉬우면서, 자칫 하나마나 한 소리 같기도 해서 흔히 ‘적당히’라는 말로 축약되지만, 이는 단순히 중간값을 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용은 능동적으로 상황을 분석해 가장 합리적이고 마음이 편안한 선택을 하라는 가르침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중용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어딘가를 능동적으로 찾아 마음이 편해지는 선택을 하라는 것으로 해석된다. 예를 들어, 무장강도와 피해자가 있다면 중립에 서는 게 아니고 당연히 피해자의 편에 서야 한다. 강자와 약자 중에서는 강자보다는 약자의 입장을 지지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중립"을 유지하는 것은 진정한 중용이 아니다. 중용은 이유 없이 판단을 유보하거나 양쪽 모두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옳은 선택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내가 했던 선택의 모호함은 신중하게 선택하고자 했던 태도에 근거했기에 중용을 실천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중용의 의미로 인해 나의 태도가 회색분자로 정의되지 않아도 된다는데 위안을 얻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균형을 찾아가는 태도는 현대 사회에서도 유효하다. 일상적인 소비 관리에서부터 인간관계, 직장에서의 선택에 이르기까지 중용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균형과 조화를 도모한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선택하며 살아간다.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일에는 도 아니면 모라는 식의 무모한 선택보다는 중용의 의미를 새기고 능동적으로 선택해야 하겠다.


이제 나는 '회색분자'라는 단어에 얽매이지 않는다. 나의 선택은 애매한 것이 아니라, 중용을 실천하는 과정이다. 누군가 다시 "왜 선택이 애매하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자신 있게 답할 것이다.


"나는 중용의 가치를 따르고 있다"


#딴엔고군분투

keyword
작가의 이전글(14) 허영의 옷을 버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