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우주의 작은 행성
살면서 해 봐야 소용없는 숱한 후회들이 있지만, 그래도 한 가지를 꼽자면, 내가 나를 알아가는데 소홀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마흔이 넘도록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살았다. 급하게 남들만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문득,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게 되었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하고 있는 일, 내키지 않게 택한 것들, 싫어하면서도 좋아한다고 말한 순간들. 그렇게 가짜 같은 인생에 에너지를 소모하다 결국 궤도에서 이탈했다. 어릴 적부터 나를 알아가는 훈련이 필요했지만, 그것을 소홀히 한 것이 지금 가장 크게 후회된다.
아이가 보통 태어날 때 적정 체중은 3kg 전후라고들 한다. 우리 딸은 2.94kg으로 태어났는데, 병원에서는 이 정도면 건강하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태아는 출산이 가까워지면 머리가 아래로 향하는 자세를 취한다. 그런데 내 딸은 막판에 힘에 부쳤는지 자세를 바꾸지 못한 상태였고, 그로 인해 남들보다 조금 일찍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해야 했다. 너의 엄마가 고생을 했지만, 다행히 큰 문제없이 적절한 무게로 세상에 나왔다. 지금도 또래보다 약간 작지만,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다. 궤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지금은 아이 진로에 대한 걱정이 더 크다. ‘무엇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보다는, 혹시 스스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른 채 남들만 따라다니다가 나처럼 힘든 길을 걷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 지금은 그저 사회 시스템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있지만, 언젠가 어른의 세계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때 큰 상처 없이, 자신만의 궤도 위에서 꿈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아빠의 간절한 바람이다.
무게와 궤도
궤도 운동은 어떤 물체가 중력이나 전자기력과 같은 힘에 의해 중심체 주위를 일정한 경로로 도는 운동을 말한다
우주에서 행성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강력한 중력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행성은 태양 같은 거대한 별의 중력에 의해 안정된 궤도를 유지하지만, 외부 요인이나 에너지 불균형으로 궤도가 변하거나 붕괴될 수 있으며, 균형을 잃으면 결국 소멸에 이를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우주의 작은 행성 중 하나다. 나에게도 나만의 무게와 궤도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태어날 때는 작고 미미한 존재다. 따라서 처음엔 주어진 환경과 사회 구조 속에서 작은 궤도를 형성하며 유영한다. 가족, 학교, 사회라는 더 큰 천체들의 중력 속에서 방향을 잡는다. 어린 시절엔 자아보다는 생존이 우선이고,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가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의 무게를 알아가게 된다. 성장, 경험, 자기 성찰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를 탐색하고, 그에 따라 나에게 맞는 중력장을 찾기 시작한다. 기존 시스템과의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고, 간신히 균형을 맞춰 공존하기도 한다. 이런 궤도와 나 자신의 궤도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삶이다.
운이 좋으면 나와 잘 맞는 궤도에 태어나, 많은 에너지 없이도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내 무게와 궤도가 어울리지 않는 궤도에 있다면, 그 궤도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고, 결국 한계를 맞이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궤도를 벗어나거나, 혹은 완전히 소멸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여파는 나 자신뿐 아니라 내 주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래서 때로는 궤도를 과감히 이탈해, 새로운 궤도에 올라서야 한다. 그곳이 나에게 맞는 곳이라면 더 적은 에너지로도 유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궤도조차 맞지 않는다면 다시 방향을 잡고 또 다른 궤도를 찾아야 한다. 이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내가 어떤 행성인가’를 아는 일이다.
나를 알지 못하면, 어떤 궤도가 나와 맞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계속 궤도를 옮겨 다니며 에너지를 소모하다 결국 소멸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묻는 습관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이 나를 버겁게 만드는가? 어떤 환경에서 나는 내 힘을 가장 자연스럽게 발휘하는가?
MBTI 검사를 하면서 짐작은 했지만, 내향적이라는 결과를 받았다. 이성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감성적이라고 나왔다. 외향적인 척, 센 척, 이성적인 척하고 다녔던 나날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채 포장지만 잔뜩 꾸미고 다녔던 거다. 쌓인 불만은 탈이 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다.
우리는 광활한 우주 속에서 하나의 작은 행성 같은 존재다. 수많은 행성과의 관계에서 생긴 궤도 중 나에게 맞는 그것을 만나 유영하듯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면, 그 삶의 시작은 나를 알아가는 것부터가 출발이다. 그러니 무작정 행복을 찾아 나서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 진짜 나의 색을 알아 갈 수 있다. 분홍색인 줄 알았던 봄망초가 사실은 흰색 개망초였다는 사실을.
딸아, 넌 누구니? 그래서 넌 뭐가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