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일상
호우특보 발효.
밤새 잠들지 못해 무척이나 피곤한 몸을 가까스로 일으켰다. 비몽사몽 한 채로 짐을 챙겨 집 밖을 나서니, 배차간격이 40분이나 되는 버스가 저 눈앞에서 유유히 지나갔다. 졸린 눈을 비비며 아파트 단지 아래에 걸터앉았다. 차츰차츰 내리기 시작하는 비를 구경하며 우산을 돌려보기도 하고, 일부러 비를 맞아보기도 하였다. 40분이 훌쩍 지나니 그다음 버스가 도착하였고, 좌석에 앉는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정신없이 자기 시작했다.
“.. 다음 정거장에서 다들 내려주세요.”
처음에는 내가 헛것을 들은 건지, 아니면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아직 도착지에 도달하려면 한참이나 남았기 때문이다. 허나 곧바로 이어지는 기사님의 말을 통해, 나는 그제야 내가 탄 이 버스가 고장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밖으로 쫓겨난 나는, 정거장에서 다음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결국 예정시간보다 1시간 30분이나 늦게 작업실에 도착하였지만, 역시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근처 카페에 들러 코코넛 스무디를 주문했다. 왕복 4시간이나 걸리는 이곳에 꾸준히 출석체크하는 나에게 주는 유일한 보상이랄까. 스무디를 한 입 먹으니 코코넛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힘들었던 것도 잠시, 나는 스무디가 너무 맛있는 탓에 그만 기분이 좋아졌다.
어느 분야에든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내 실력은 그들에 비하면 한참이나 멀게 느껴진다. 선생님께선 내 실력이 뛰어나다며 항상 칭찬하시곤 하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그 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완벽주의자 성향에 가깝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이게 실제 사실인 걸까? 나의 실력과 작업물은 매번 보잘것없고 부족하다. 허나 그렇다고 한들 이러한 점이 나를 좌절시키진 않는다. 오히려 실력을 더욱 키우고 싶다는 의지와 의욕이 샘솟도록, 매일같이 성실함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생기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허나 오늘은 부족한 점이 많았던 만큼, 좋았던 기분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작업실 밖으로 터널터널 걸어 나오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쓰고 사람들 사이에 치이며 정류장에 도착하니, 또다시 코앞에서 버스가 지나쳤다. 나는 멀어져 가는 버스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피곤함과 배고픔, 습함과 축축함이 더해지니 나도 모르기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류장을 떠나 정처 없이 근처를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누군가에게 연락이라도 하고픈 심정이었지만, 그렇다 한들 연락할 만한 사람이 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습한 날씨를 이기지 못한 채 인근 편의점에 들러 간식거리를 하나 구입했다. 그렇게 20분 동안 멍을 때리다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비는 장대같이 퍼부었고 길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갑자기 우산 없이 무거운 짐을 끌고 가는 한 어르신이 눈에 띄었다. 신호는 초록색으로 바뀌었고 그 어르신은 활처럼 휜 등으로 비를 흠뻑 맞으며 발걸음을 옳기기 시작하였다. 나는 슬며시 그 어르신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내가 쓴 우산을 왼쪽으로 슬쩍 기울였다. 어르신은 정신이 없으셨는지 곧바로 버스에 올라타셨고, 나는 그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비록 알아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지언정, 나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그다음 버스에 올라탔다.
힘든 일을 별 대수롭지 않게 마주했기 때문인 걸까,
혹은 사소한 것에도 행복할 줄 알았기 때문인 걸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오늘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