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몸담는 공동체가 작동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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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15주간 전도집회를 개최하고 있는
복음주의자 빌리 그레이엄(1918 - 2018) 목사. 1957
Evangelist Billy Graham preaching at Madison Square Garden.
Gjon Mili(1904 - 1984) © Life Picture Collection
열정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설파하는 목사의 몸짓 뒤로 "I am the way"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사실 전도 집회의 모습은 정당의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인 전당대회의 모습과 크게 닮아 있다.
정치인들은 '정치적인 목적'의 연설을 하고, 종교 지도자들은 전도를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경로가 공동체의 바람직한 방향이자,
도처의 사회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방법(way)임을 강조한다.
글을 쓰는 것은 사고의 끊임없는 확장에 기인한다.
특정한 단어와 문장이라는 뿌리에서부터, 생각의 가지를 도저히 셀 수 없을 만큼 뻗어나가게 하는 행위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글을 적는 사람 그리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체험 가능한 세계를 더욱 넓힐 수 있도록 기여한다. 예전에는 감히 넘보지 못한 공간으로, 활동 범위를 늘려가는 감각의 스펙트럼은 우리가 더 많은 존재들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사고에서 출발한 OneWord 시리즈는 굳이 곱씹어 보지 않고 넘어가는 수많은 일상의 단어들이 가진 조그마한 세계를, 글쓴이의 단견으로 하여금, 감각하고 확장시키는 데 있어 그 의의를 가진다. 한 단어와 연관된 수많은 다른 단어들, 사고들, 문장들 중 극히 일부만을 주관적으로 추려,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한다. 그리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공감하는 세계를 서서히 확장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했으면 하는, 글쓴이의 작은 바람이 담긴 문자들을 기꺼이 공유하려 한다.
바야흐로 정치의 해, 2022년이 막을 내렸다. 상반기에 치러진 두 번의 선거는,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민의를 도출해 내었다. 선거가 만들어낸 두 번의 백야. 누군가는 답답함에 잠 못 이루고, 또 누군가는 환희와 감격에 겨운 밤을 보냈을 것이다. 그저 평소의 매일처럼 잠을 청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절망과 희망의 감정은 교차하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 우리는 다시, 그리고 또 한 번 선택의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1년 뒤, 3년 뒤, 4년 뒤, 그리고 무한히, 우리가 일구어낸 인류 문명이 유지되는 한에서는. 우리는 선택하고, 비판하고, 환호하며, 현실에 좌절하고, 리콜할 것이다. 우리의 힘이 다할 때까지.
하지만 이 글에서는 아쉽게도, 글쓴이의 능력 부족으로 인해, 선택하고 비판하는 법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을 예정이다. (관련 전공자도 아닐뿐더러, 나도 모르게 한 쪽으로 치우쳐진 생각을 전할까 두렵다.) 대신 우리의 선택이 의사결정의 시스템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 그리고 사회의 수많은 선택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글은 관련 학문의 권위자나 전공자의 지식이 아닌, 그저 한 소시민이 자신의 삶 속에서 정치에 대해 주의 깊게 살펴보았던 점들을 중심으로 쓰일 것이다. 우리의 시스템에 대해 사려 깊게 생각했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사실이 글의 깊이 있음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누군가에게는 친숙한 단어들, 누군가에게는 낯선 ‘정치적인’ 단어들에 대해 글쓴이의 생각을 천천히 전달하려 노력할 것이다.
정치란,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인 분배(authoritative allocation of value)이다.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 (1917-2014)
그의 저서 A Framework for Political Analysis(1965)에서.
사전적으로 정치는, 사회적 가치의 분배에 대한 공동체의 모든 의사결정 또는 그 과정을 의미한다. 글쓴이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타인이나 다른 조직의 어떠한 위협도 받지 않고 가치의 분배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내보일 수 있게 문명이 발전시켜 온 시스템"이라는 관점에서 현대의 정치를 바라본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을 분배하고 공유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특정한 소수’가 권위를 가지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독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했던 역사가 우리의 문명에 다시는 발현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상적으로, 혹은 원칙적으로는)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정치적 사안들은, 비슷하거나 공통된 의견을 가진 다수에 의해 결정되되, 정책의 집행은 소수를 존중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면서 다수와 소수의 총합은 (특정 계급이나 집단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 모두가 되어야 하며, 그들의 의견을 정당하게 대변해줄 대의기관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현대에 이르러, 정당한 권리를 가진 기관이 합당하게 결정한 분배의 방식만이 권위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분배가 지금의 정치를 떠받치는 기둥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므로, 현대의 정치를 기술하는 데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것은 바로 민주주의인 것이다. 공동체 모두가 자유로이 의견을 펼치고, 자신의 삶에 대해 온전히 선택할 권리를 갖는 것. 서로를 존중하고,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것. 어떤 사람도 누군가의 위에 군림할 권리를 갖거나, 누군가에게 복종할 의무를 갖지 않는 것. 무수하게 존재하는 우리의 권리, 우리가 그저 숨을 쉬는 듯이 받아들이는 모든 것들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체계가 바로 민주주의인 것이다.
이 글에서는 아쉽게도 우리의 문명이 이렇듯 아름다운 체계를 구성하는 데 필요했던 희생과 기폭제가 되었던 모멘텀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 다른 키워드(예를 들면 ‘역사’ 같은 것)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글쓴이의 능력 한계인 것은 굳이 숨기지 않겠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만 겉핥기식으로 알아보자.
일단은, 모여야 한다.
의사당이 절로 거대한 펜타곤이 된 듯이 싸우든, 모두가 익명성의 가면을 쓴 듯이 험한 말이 공기 중의 파동으로 난투극을 벌이든,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함께 존재하며 각자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나머지는 그다음에 생각하도록 하자. 경청과 건설적인 논의, 합리적인 결론 도출이라고 하는 것들은 인류 공동체 모두에게 요구하기 아직 벅찬 과제이다.
80억의 인류를 지탱하는 행성 위에는 한 사람의 ‘자립적인’ 목소리란 존재하지 않는(정확히는, 존재할 수 없는) 광장과 의사당이 수두룩하다. 그런 곳은 차마 ‘의회’라 불러줄 수 없으므로 이 단락에서 논외로 한다. 또한 개인이 개인으로서 스스로의 인격을 지지할 수 없는 사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도록 하자. 이러한 곳에서는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사람들의 생각이 대의기관에 전달되기 어려우므로, 글쓴이가 나름대로 ‘민의가 모이는 곳’이라 정의한 의회의 단순한 의미를 굳이 되짚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위의 경우를 제외하고) 잘 닦여진 민주주의의 기반 위에서, 고도로 문명화된 언어의 전쟁터인 의회는 사회의 다양한 욕망이 투영된 공간이다. (이러한 '욕망'들이 어떤 방식으로 의사당의 공간을 차지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6. 선거: 우리의 권리 부분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의회를 구성하는 여러 정당은, 선거를 통해 정치적인 의견을 표출한 시민이 합법적으로 부여한 '대리의 정당성'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각자의 이념에 맞는 방식으로 정치권력을 행사하려 애를 쓴다. 정확히 의회가 가진 권력이라 함은 기본적으로 법을 만드는 권한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 의사당에서 가장 많은 공간을 점유하는 공동체(일반적으로 의회의 과반 의석을 확보한 정당)가 가진 힘은 법을 제정하는 권한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과연 모든 의회가 그러한 능력을 다른 어떠한 '권력 주체'의 영향도 받지 않고 행사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또한 공동체의 갈등만 형식적으로(혹은 고상한 방식으로) 표출할 뿐, 사회의 다양한 문제나 시민들의 요구를 그들의 고유 권한인 입법을 통해 해결하고 정치에 반영할 수 있는 능력을 자체적으로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감도 동시에 밀려온다. 흔히 이야기하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의회로 하여금 느끼는 '정치 효능감의 부족'이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의문의 답은 아쉽게도, 당연히, '아니오'이다. 구성원의 의사를 투표로써 전달하는 대의민주제 자체에 회의를 품거나, '역시 정치인들은..... 언제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라는 무력감보다는 다른 정치 권력(주로 행정부)과의 관계성에 주목해 당연한 답이 도출된 과정을 천천히 되짚어 보자. 미국 정치학자 넬슨 W. 폴스비(Nelson W. Polsby, 1934-2007)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의회의 형태를 크게 두 가지로 정의하였다. (↓전공서적 느낌의 표 주의↓)
전환 의회와 무대 의회의 가장 큰 차이는 행정부와의 관계와 의원의 독립성이라는 요소에서 비롯된다. 입법부와 행정부 사이의 경계가 명확할수록 의회의 전환적 성격이 짙어질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 주로 대통령(President)이 행정부의 최고 책임자로서 기능하는 경우에 그러하다. (이를 대통령 중심제라고 하는데, 자세히는 4. 대통령제와 내각제: 작동 방식에서 다루겠다.) 이론상 그렇다는 것이며,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시 그 사람이 99%의 확률로 옳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로 (대통령의 권력이 너무 비대한 경우의) 역사적 근거가 차고 넘친다. 그러나 미국처럼 권력의 분산과 상호 견제를 잘 조직한 경우라면, 입법부가 가지는 전환 의회로서의 정체성은 헌법이 작동하는 한 저절로 지켜지게 된다.
여기서 의문은, 우리가 민주주의 선진국이라 흔히 칭송하는 서유럽과 북유럽의 국가들은 행정부와 입법부가 사실상 결합된 형태인 '의원내각제'를 택하고 있음에도, 명목상 '대통령 중심제'인 한국의 시민들보다는 자국의 의회를 더 신뢰한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정확히는 한국 시민들이 의회를 자국의 다른 어떠한 기관보다 신뢰하거나, 청렴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한국행정연구원에서 매년 실시하는 사회통합실태조사에서, 지난 3년간(2020-2022) 한국 국회는 (1-4점의 척도 내에서) 각각 1.9/2.2/2.0점을 기록하며, 신뢰도 최하위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청렴도 인식은 1.9/2.1/1.9로 역시 최하위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대통령 중심제와 한국의 그것은 무엇이 다르길래, 한국 시민은 국회를 '전환 의회'로서의 효용성을 전혀 지니지 못한 기관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정치 선진국들의 '의원 내각제'는 어떻게 작동하길래, 꾸준히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인가. 과연 진정한 권력의 '분산'과 건강한 정치 문화는 어떤 환경에서 창발될 수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