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403
한나절 전체를 몽땅 화분 열한 개 분갈이에 써버렸다. 단순히 힘든 일이었다고 정리하기엔 이 하루는 손끝에 남은 흙의 감촉처럼 내 안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아침에 창문으로 흘러든 빛이 유난히 또렷했다. 바람도 없이 고요하며 안개가 자욱하게 낀 날이었다. 오늘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날. 이런 날은 몸이 먼저 움직인다. 커튼을 젖히고 2층 거실로 올라가 남향 창가에 나란히 놓인 아이들을 바라봤다. 겨울을 지나며 기운 빠진 잎, 삐뚤어진 줄기, 비좁은 화분 속에서 서로 뒤엉킨 뿌리들. 말 못 하는 식물들이지만, 그 표정은 분명했다. 무심하게 방치된 채로 ‘나 좀 꺼내줘’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모두 시트러스지만 키도 잎모양도 물을 머금는 방식도 제각각 다른 아이들. 나인파운더 레몬, 페르시안 라임, 불수감, 유레카 핑크 레몬, 푸치마루 낑깡 등등등. 이름만 읊어도 마치 향기로운 과즙이 혀끝에서 톡 하고 터지는 느낌이 든다. 하나하나 사연을 가지고 내 품으로 들여온 생명들이었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 내가 돌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묘한 죄책감이 밀려왔다.
식물들을 하나씩 조심히 들고 수돗가로 향했다. 2층에서 외부 수돗가까지 열한 번의 왕복. 팔이 저릿해질 무렵, 마침내 모두를 나란히 바닥에 놓았다. 햇살이 따갑게 울려 퍼지는 점심 나절이었다. 에어포트 화분들을 꺼내 조립했다. 검은색 직사각형 프레임을 바닥판에 둘러 결합하며 화분을 만들고, 분갈이 용구들을 하나하나 본격적으로 정리했다. 새로 개봉한 상토 자루에서 퍼 올린 흙은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흘렀다. 흙에 손을 넣는 그 짧은 순간 마음이 의외로 평온해졌다. 머릿속에서 웅웅 거리던 잡음들이 갑자기 사라지고 오직 흙과 손의 접촉만이 존재하는 시간. 생각보다 더 순수한 몰입이었다.
낡은 화분에서 아이들을 꺼내는 일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뿌리가 단단히 엉켜 있었고, 어떤 아이는 배수구 쪽으로까지 뿌리를 뻗은 채였기에 뽑아내는 데도 꽤 시간이 걸렸다. 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천천히, 최대한 부드럽게. 그 뿌리를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오랫동안 꽉 막힌 공간에서 숨도 못 쉬고 자라온 모습이었다.
쪼그려 앉아 엉킨 뿌리를 하나하나 풀어냈다. 기존 뿌리에 묻어있던 흙도 조심조심 다 털어냈다. 너무 한 방향으로 치우쳐 자란 뿌리는 살짝 다듬었다. 마치 오래된 감정을 정리하는 일 같았다. 꺼내기도 벅차고, 들여다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는 감정들. 그래도 언젠가는 꼭 만져야만 하는 감정들. 그런 것들을 내가 지금 흙과 뿌리를 다루듯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조금은 요란해진 햇살이 흙먼지를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손톱 사이로 끼어든 흙과 몸 곳곳에 퍼지는 묵직한 통증. 모든 감각이 살아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이 식물들과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지 않지만, 누군가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존재.
새 화분에 식물들을 하나하나 옮겨 심었다. 바닥을 다지고, 뿌리를 안착시키고, 흙을 부드럽게 덮은 후 듬뿍 물을 줬다. 물줄기가 흙을 타고 스며드는 모습을 보며 묘한 위로를 받았다. 물이 스며들 듯, 나도 그렇게 서서히 치유될 수 있을까.
전날 밤에 창고에서 꺼낸 낡은 이름표에 식물 이름을 손글씨로 써넣었다. 글씨가 조금 비뚤어졌지만, 그게 오히려 좋았다. 살아있는 존재에게 이름을 붙인다는 행위는 언제나 마음을 움직인다. 인정과 애정, 돌봄의 시작. 이름을 불러주는 그 짧은 순간에 식물과 나 사이에 조용한 연결이 생긴다.
마지막으로 코코화이버로 멀칭을 해줬다. 흙의 온도를 지켜주고, 수분을 오래 머금게 해주는 그 부스스한 섬유들을 살살 얹으며, 식물에게 작은 담요를 덮어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행위적으로, 피상적으로 감히 재단할 수는 없겠으나 손길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는 일. 그게 요즘의 나를 사람답게 만드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모든 작업이 끝났을 무렵, 이미 해가 붉은 화음을 연주하며 서쪽 하늘에 낮게 걸려있었다. 식물들을 다시 2층 거실로 옮겼다. 볕이 가장 잘 드는 남향 창문 앞, 따뜻한 오후의 잔광이 남아 있는 자리에 아이들을 한 줄로 세웠다. 조심스럽게, 마치 전시하듯. 바닥에 흘러내린 흙을 쓸고 난 뒤 창밖을 바라봤다. 그 순간 느꼈다. 아, 이 아이들은 봄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줄기 끝에 새순이 올라오고, 형광연둣빛이 감도는 잎맥 사이로 작고 여린 생명이 꿈틀대고 있었다.
내일은 철사로 수형 교정도 해줄 예정이다. 조금 더 보기 좋은 모양으로, 빛을 고르게 받을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줄 거다. 억지로 틀진 않겠지만, 잠깐의 불편이 오래도록 건강을 가져다줄 수 있다면 그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각 화분마다 지렁이도 넣어줘야지. 흙을 뒤집어주고 숨통을 틔워주는 조용한 친구들. 그 작고 미약한 움직임이 토양을 살리고, 식물을 살린다.
그런 하루였다. 무언가를 ‘끝냈다’기보다는 어지럽던 내 마음의 먼지를 살살 털어낸 날. 기계적인 일상이 아니라 아주 생물적인 하루. 나의 체취와 흙냄새로 범벅이 되어있는 손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나는 지금, 꽤 잘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아주 조용하지만 또렷하게, 내 삶의 균형을 다시 중심 쪽으로 옮긴 것 같은 기분. 작고 사소한 움직임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밤이 깊어가고 있다. 새로 심은 화분들에서 흙냄새가 희미하게 올라온다. 창문을 열어두니 알싸한 기운이 얼굴을 스치고, 따뜻한 잎사귀 위로 은은한 별빛이 내려앉는다.
이 아이들과 함께라면 나도 좀 더 괜찮은 인간이 되어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