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03
물리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삶은 허상이고, 찰나라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현상일 뿐이며, 소멸의 의미만을 가진 고통의 연속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난 올해를 지나오며 나의 현존과 신적인 존재의 현존을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느꼈으며, 모든 것을 쉬어가고 있는 지금도, 매일 밤 퇴근길에 나를 으스러지도록 안아주는 엄마의 품 안에서,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하는 연인에게서, 친구의 서툰 진심에서, 아가페를, 에로스를, 필로스를 느낀다. 곧, 나는 실존하는 인간이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조차 의미이기에 존재적인 위기는 의미로써 방어된다는 것이다.
부조리함. 나를 지난 몇 년간 강하게 옭아맸던 단어. 부조리를 안다는 것은 곧 '부조리함을 응시한다'라는 것이며, 산 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응시함'에로의 결정은 죽음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는, 다시 말해 삶의 무상성을 인지하며 살아가겠다는 반항이라고 한다. 결국 그 모든 것이 살고 싶어 발버둥 치던 나의 모습이었구나. 처절하게도 살고 싶었네.
30대가 막 되었을 때의 스며들던 허무주의를 실존주의로 내쫓으며 접 한 알베르 까뮈의 책들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어의 향기를 내 삶에 진하게 입혀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맞이한 서른넷, 삶과 죽음의 지워진 경계를 살아내던 일상을 지나가며 실전 인생에서 제대로 배운 것은, 결국 죽음에서 삶을 바라본 것이 아닌 삶에서 죽음을 바라봤기 때문에 생겨났던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었다. 비록 아프긴 했으나, 결괏값은 삽질로 점철된 내 삶에 대한 타자화적 수용이었고, 하나의 간단한 패러다임 쉬프트로 인해 복잡한 문제의 가장 큰 매듭이 풀려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적인 삶을 선택해야 할 당위성. 어쩌면 거기서 집 밖으로 내 몸을 옮겨 낼 첫 용기가 솟아 나왔을지도.
그러니까, 조금 더 적극적으로 그 당위성을 방패 삼아 내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운명에 맞서 반항하며 끝까지 살아남을 거다.
아, 삶과 죽음의 경계가 다시 뚜렷해지고 있고, 나는 '바로 지금', 살아 있으며 인식하고 응시하는 피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