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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우림 Dec 15. 2023

어서와, 족저근막염은 처음이지?

족저근막염에 딱히 장점이랄건 없지만 기왕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걸을 때마다 발 아치에 쥐가 난 느낌이 일주일 내내 지속되는 바람에 병원을 안 갈 수가 없었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발 아치 옆에 엄지손톱보다도 큰 부주상골이라는 잉여 뼈가 발견되었다.


요약하자면 발 자체가 걷거나 뛰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더 이상 발이 아프지 않게 되더라도 유산소 운동은 30분 이상 하지 말고, 하루에 7천 보이상 걷지 말라는 처방을 받았다. 아직 살 날이 구만리인데 벌써부터 여기저기 고장나기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우울했다.

족저근막염 [출처 국가건강정보포털]

설상가상으로 이놈의 족저근막염 때문에 내 유일한 취미인 헬스마저 그만뒀다. 발을 딛기만 해도 아픈 탓에 상체운동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게 없기 때문이었다. 남는 시간에 할만한 게 없어서 하릴없이 유튜브만 봤다. 그래서인지 요새 내 알고리즘에 별의별 콘텐츠가 뜬다. 갑자기 버튜버 아이돌이 뜨기도 하고, 웬 중국인이 불량식품 같은 걸 먹는 영상도 뜬다.


그중에서도 가장 뜬금없는 영상은 바로 2009년 전 국민이 잠깐 최면에 걸린 것처럼 빠져있던 드라마, '꽃보다 남자' 클립이다. 거의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서인지 보는 영상마다 새롭게 느껴졌다.


제일 충격이었던 건 바로 하재경(이민정 역)이었다. 중학생 시절 기억하던 하재경은 경호원을 피해 늘 도망 다니는 철없는 성격의 구준표 약혼녀에 불과했다. 금잔디를 제외한 다른 등장인물들은 설정상 부잣집 아들딸이라 등교할 때 늘 때깔 좋은 스포츠카를 타거나 클래식한 수입차를 타고 다녔는데, 유일하게 하재경만 혼자 걸어 다녔다. 그래서 F4보다는 못한(?) 준 재벌정도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다시 본 영상 속 하재경은 구준표보다도 더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재벌이었다. 어느 정도로 돈이 많냐면 섬 하나를 통째로 사서 프러포즈하는 그 구준표가 돈 때문에 하재경과의 약혼을 깨지 못하고 쩔쩔맬 정도였다. 학교에 늘 걸어 다닌 이유는 항상 고급 세단만 타고 다녀서 오히려 걷는 걸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예전 같으면 얼마나 차만 타고 다녔으면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할까 정도로만 느낄 등장인물의 설정이었을 텐데, 이번에는 하재경의 사연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하재경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어마어마한 재벌이라는 설정이 비슷하다는 건 아니고, 자유롭게 걸어 다니고 싶은 소망이 비슷하다는 뜻이다.


그시절 이민정 청순 그잡채..


족저근막염 때문에 하루에 2천 보이상 걸으면 발이 아프다. 다행히 운전을 할 줄 알아서 2 천보 이상 걸을 일이 별로 없긴 하다. 하지만 걷지 않아도 되는 것과, 걸을 수 없는 것은 차이가 꽤 크다. 대학생땐 하루에 만보는 당연히 넘게 걸어 다녔고, 어디 놀러라도 가면 3만 보는 걷는 게 일상이었다. 대중교통이 아무리 잘 되어있어도 환승을 할 때마다 무조건 걸어야 하는 탓이었다. 그때는 그만 걷고 싶어도 무조건 걸어 다녀야 했는데 이 걷고 싶어도 못 걷는 상황이 되었다.


사람 생각하는 게 참 웃기다. 이쪽에 있으면 저쪽이 부럽고, 저쪽에 있으면 이쪽이 부럽다. 대학생땐 걸어 다니는 게 지치고 힘들었는데, 지금은 발이 아파 운동을 아예 못하니 원 없이 걸어 다니던 때가 그립다. 회사 다닐 땐 퇴사하고 싶다며 노래를 불렀는데, 막상 백수가 되고 나니 어차피 뭘 해도 불행할 거라면 차라리 돈이나 버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해서 자가용을 타고 다닐 생각은 꿈도 못 꾸는 금잔디가 있는 반면, 그저 학교까지 걸어 다니고 싶을 뿐인데 늘 경호원에게 제재를 받는 하재경이 있다.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아쉬움이 항상 남는다. 말 그대로, '이곳'보다 더 나은 '그곳'은 없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든 항상 아쉬움이 따른다면, 사소한 불행요소에 굳이 연연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버드대학교 교수이자 정신과 전공의인 조지 베일런트가 쓴 '행복의 조건'에는 이런 말이 쓰여있다.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고난에 대처하는 자세, 즉 고난에 대한 성숙한 방어기제라고. 아쉽고,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더라도, 빠르게 대처하고 다시 행복의 상태로 복귀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사는 건 고난의 연속이라 삶이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다. 그러니 고통에 빠지지 않는 것보다, 고통에 빠져도 빠르게 회복하는 탄력성이 더 중요다.


물론 발이 아파 못 걷는 건 딱히 장점이랄 게 없다. 하지만 기왕이면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족저근막염 때문에 오래 하던 헬스를 그만두는 대신 수영이라는 스포츠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사실 발 아픈 사람이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얼마 없어서 수영 말곤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지만 본의든, 본의 아니든 새로운 배움에 도전하는 건 인생의 또 다른 기쁨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참에 제대로 수영을 배우고 새로운 기쁨을 누릴 기회를 얻었다 치기로 했다.


초콜릿에는 단맛과 쓴맛이 공존하지만, 사람들은 초콜릿이라고 하면 '쌉쌀한 맛'보다는 '단맛'을 먼저 떠올린다. 세상 사는 것도 초콜릿을 맛보는 것처럼 살아가는 건 어떨까. 쓴맛보다는 단맛에 집중하며 사는 것이다. 비록 청천벽력처럼 족저근막염으로 헬스를 그만두게 되었지만, 어떻게든 새로운 취미를 찾아낼 기회로 친 오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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