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서른 하나
태어나 처음으로 건강검진을 했다. 걱정했던 혈압수치나 심장은 아무 이상 없었다. 비정상이 나온 건 생각지도 못한 ‘우울증’이었다. 0점부터 27점까지 4가지로 나뉜 항목에서 내가 속한 건 5~9점 '가벼운 우울 증상'이었다. 병원에선 친절하게 검사지 뒤에 우울증과 극복 방법 공지문을 하나 끼워줬다.
생각지 못한 결과에 가족들은 신속히 태세 전환을 했다. ‘네가 무슨 우울증이야’라고 말한 엄마는 내 일상에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평소 ‘운동은 하고 왔니?’, ‘너무 많이 먹지 말라’고 말하던 말투와 달랐다.
아빠는 오랜만에 내 방 불을 꺼주며 머리맡에 와서 기도를 해줬다. 남동생은 집 근처 크로플 맛집을 찾았다며 토요일에 함께 브런치를 즐기자고 했다. 누군가의 지령을 받은 듯한 과한 친절은 낯설지만 좋았다.
2030 여성들에게 우울증은 한 번쯤 겪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난해 두 달 동안 매주 월요일 저녁 상담을 받았다. 원인은 모르지만, 지하철을 타는 게 버거웠다. 두 정거장 가면 토할 것 같아 내리고 어지러워서 내리고를 반복했다. 따릉이를 타고 출퇴근하며 알았다. 상담을 받아봐야겠구나.
코로나로 서울심리상담센터 선생님과 비대면으로 만났다. 꼬박 한 시간이 걸리는 검사 결과, 나는 어느 증상도 없었지만, 선생님은 매주 한 시간씩 나와 대화를 나눴다. 나만 가진 문제라고 생각했던 건 내 또래 모두가 가진 문제였고, 가까운 이와의 대화법을 바꿔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다.
선생님은 부모님 허락 없이 남자친구와 1박 2일로 여행을 가지 못한다는 고민을 듣더니 기겁을 했다. 착한 딸 그만하고 비뚤어져도 된다고 했다. 누구보다도 내 주장을 강하게 말한다고 생각했던 터라 이런 진단은 낯설었다.
'상담받고 있다'는 이야기는 최대한 건조하게 툭 하고 던졌을 때 반응이 왔다. 상상했던 이상으로 상담받는 친구들은 많았고, 알게 모르게 연대 감정이 생겼다. 다들 우울증 하나씩은 갖고 살구나 싶었다.
그래도 증상 없이 상담받는 것과 우울증이란 병명을 받아든 건 엄연한 다른 느낌이었다. 유난스럽게 여성 우울증에 관한 책을 사서 포스팃을 붙이며 읽었다.
치료에 있어서 그 이야기가 어떤 버전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를 다시 씀으로써 그 상황을 소화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가,
그것이 중요하다.
하미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동아시아, 2021)
욕 나오는 일 년을 기록하고자 책 쓰기를 택한 내가 자랑스러웠다.
너란 여자, 자가 치유능력까지 겸비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