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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멘 Feb 05. 2022

쿠션어 사용 금지

일 

                        

 일상에서 가장 많이 마주하는 나이대가 있다면 50대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인사하는 이, 출근해서 인사하는 이, 취재를 위해 연락하는 이, 만나는 이의 절대다수가 50대 남성이다. 언론사 부장급 정도니, 취재원 대부분이 50대 남성인 게 어쩌면 당연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나도 모르는 습관이 하나 생겼는데 알고 보니 그게 쿠션어였다. 쿠션어란 틀린 내용 하나 없는데도 조심스러워하고, 자신의 주장이 단정적으로 들릴까 봐 애교와 이모티콘 같은 쿠션을 이어 붙여 문장을 맺는 어법이다.   

   

 기자가 되고 첫 출입처에서 마주한 취재원은 똑똑하고 굳센 분이었다. 에둘러 질문하는 걸 싫어했고, ‘오늘 날씨가 좋네요’ 따위의 인사말은 반가워하지 않았다. 질문이 성에 차지 않을 땐 내게 공부해서 질문하라며 다그쳤다. 질문은 내가 하는데, 그의 앞에만 서면 면접 보는 기분이었다. 인간관계에 서툰 사회초년생은 까칠함에 대응하는 법을 잘 몰랐다. 그에게 질문할 때면 질문지를 미리 적어놓고 달달 읽은 다음 전화를 걸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조금이라도 예의 바르게 또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 말끝마다 ‘^^’를 붙이거나 ‘:)’를 붙였다. 자칫 내 주장이 강하게 느껴질까 조심스레 얘기하고, 버릇없다 느낄까 공손한 높임말을 쓰고, 상대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애교와 이모티콘, 물결표시를 사용했다. 이를 상대방의 미움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수단이라 믿었다.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어법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무렵, 칭찬으로 둔갑한 외모 평가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내게 “요즘 유독 얼굴이 피었어요, 곧 결혼하나”, “여긴 기자들을 얼굴 보고 뽑나봐요”, “볼 때마다 예뻐지네” 등의 그들만의 쿠션어를 사용했고 점점 웃으며 넘기기 불편해졌다.  

    

 더불어 나의 연차도 그만큼 쌓였다. 과도하게 숙이지 않아도 답변을 당당하게 요구할 줄 알게 됐고, 언성 높이고 싸워도 다음날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사회성이 길러졌다. 악의 없는 외모 평가에 적당히 웃으며 의미 없이 받아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가끔은 성격 드센 여자로 비칠까 혹은 자기주장이 강한 여자로 비칠까 싶어 쿠션어의 유혹이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쿠션어를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내가 아는 여기자들은 상냥하던데’란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 데 일조할까 썼다가 지운다. 혹여나 나의 잘못된 습관이 후배 기자들에게 잘못된 관습을 물려주는 것일까 봐, 혼자만의 작은 노력이지만 난 오늘도, 지켰다.       




                                  

   쿠션어, 여자어를 쓰지 않는 노력을 하는 만큼 중요한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다른 여성(특히 당신보다 나중에 태어난 여성)이 쿠션어, 어자어를 쓰지 않을 때 거북해하기를 그만두기다. 동석한 남자를 대신해서 나이 든 여자들이 화내주지 마라. 분위기를 읽고 여자 욕을 여자가 해버리는 일. 내가 아는 최악의 여성어    
이다혜 『출근길의 주문』 (한겨레출판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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