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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ypyo Jan 21. 2020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흥미로운 설문조사 결과를 봤다.

(질문) 아이들이 어떻게 컸으면 좋겠어요?
(답변) 음..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1위)

하고 싶은 일이란 무엇일까. 내가 그 일을 하면서 채워지고 있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물어도 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일까. 대부분의 책과 강의는 같은 내용을 다른 형식으로 다루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지루하다.

+
세상에는 가르침이 많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주변에는 항상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등 떠밀려 앉았던 어색한 책상에 앉아 노트를 펼쳐 따라 적었던 그들의 가르침이 어느새 새로운 노트로 이어졌을 때, 문득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 받아 적고 있는가 의문이 들었다. 꾸물꾸물 기어가는 글들이 정말로 입이 닳고 닳도록 말해도 아깝지 않고 피가 되고 살이 될까도 의심스러웠다.

그럴 때면 잠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 뿌연 흙먼지가 일어나는 운동장을 보고 있으면 당장에 공을 던져 가로지르고 싶었다. 헛발질을 하고, 친구들이 웃고, 부끄러워 헤헤 웃어도 그곳에는 가르침보다는 그저 웃음과 격려가 가득한 곳이어서 불편함이 없었다. 탁탁탁 분필이 칠판 위에서 부서지며 내는 소리가 들리면 고개를 다시 돌렸다. 그러면 선생님은 우리 앞에 소중한 가르침을 한 가득 풀어놓고는 외친다.  

“자 그래서 이것은 무엇이다! 바로 이것이다. 안 적고 무엇하느냐 제군들!”

+
다들 나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사회에 나왔을 텐데, 자식을 어떻게 키우고 싶냐는 질문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놀랍다. 그 의미가 다양할 수 있겠지만, 보통의 희망사항은 현실 부정임을 감안해보면, 그들에게도 하루가 꽤 긴 모양이다. 모니터를 보면 한숨부터 나오는 이유가 화가 나서 인지 아니면 슬퍼서 인지 불분명한 원인과 그 대상 또한 나인지 사회인지 부모인지 상사인지 헷갈리는 것이 특별한 이야기가 아닌가 보다. 그렇게 모두가 일단은 이곳을 어떻게라도 벗어나자는 생각을 하나 보다.

근데, 가만, 여기서 벗어나면 
그게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일까.

+
잠시 한 눈 판 사이에 미리 대처할 겨를도 없이 육아와 교육이라는 미션을 부여받았다. 짧은 시간 동안 그것에 전념을 해봤지만, 답이 없는 것 같다. 다들 비슷하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문제는 그들의 행동에는 답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쩐지 불안하다. 안전제일 추구 시대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고 외치는 것만큼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그 ‘하고 싶은 일’이라는 정의 또한 무엇일까.

그래도 가장 큰 보험은 힘인가 보다. 일단은 돈과 권력을 가져보자. 그래서 자리싸움에서 이겨보자. 선점 우위를 통해서 유리한 고지에 가깝게 다가서고자 하는 모습을 또 바라보니, 코 흘리기 시절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싸움을 잘해서 원하는 뒷자리에 앉거나 급식 차례를 우선으로 가져가는 것. 내가 원하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지금은 원하는 곳에 살 수 있다는 것으로 바뀐 것 같다. 장기든 단기든 내가 원해서 그곳에 있다면 힘이 센 놈이다. 성공이다. 잘 살고 있다고 할 만하다.

근데 문제는 힘센 놈도 하고 싶은 일, 자기 일을 하는 것을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자기 일이라니... 노동하는 인간이 자기 일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냐. 근데 여기서 또 다른 문제는 그것이 바로 내 일이라고 선뜻 말하는 게 어렵다는 것이다. 딜레마. 혹은 쪽팔림. 부가가치의 크기를 떠나서 다양한 스펙으로 쌓아 올린 내 자존심의 문제다.  

여하튼 나 또한 내 아이가 원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그 소망 실현의 출발은 바로 나부터이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그리고 얼마나 우리 가족과 사회를 위해서 중요한 일인지 경험하고 보여주고 동참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한 인간으로서 나의 불확실한 이상을 억지로 주입하려고 할 것이다. 분필을 갈아 마시며 피를 토해 내던 다른 어른들처럼 말이다. 뭐 간혹 나는 아빠처럼 살기 싫다는, 슬프지만 확실한 동기부여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희망에 부풀어 멋진 미래를 꿈꾸던 시절에 멋져 보였던 것은, 애꿎은 분필을 부러뜨리지 않고 가만히 곁에서 함께  창밖을 바라보면서 ”날씨가 참 좋구먼” 하고 호탕하게 웃던 그 선생님의 미소였다. 그 미소가 품고 있는 의미가 세상은 아무렇게나 생겨먹었지만, 또 내가 생각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닐까로 해석해본다. 그리고 언제나 든든하게 곁에서 응원하고 있다는 격려였다. 분명 그 선생님은 자기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아들이 원하는 것을 원할 수 있도록 나도 원하는 것을 해보는 하루가 되고자 한다. 그리고 멍하니 망상에 빠진 아들을 발견하면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아빠가 되자고 다짐해본다.

그래서 이 글을 썼다. 후에 읽으면 어떤 글이 될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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