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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ypyo Oct 19. 2020

[책] 흰 눈은 모든 것을 덮는다

다시, 일어서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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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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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 막혀오는 숨을 참느라 너무 힘들었다. 소설이라고 하니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작가의 경험 어느 한 켠에 움츠리고 있던 사실이 스며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눈을 잠시 감았다. 책에는 흰 눈이 내리는 날 기르던 개와 함께 기뻐하며 뒹굴며 신나 하는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가 어른이 되어 한강 다리 밑으로 몸을 반쯤 밀어 넣었을 때 그녀에게 흰 눈은 모든 아픔을 덮고 함께 녹아내릴 것만 같은 소리 없는 위로였다. 아픔과 상처로 가득한 삶은 수북하게 쌓이는 눈만큼이나 여리고 금방 사라질 것 같았지만 하얗게 맑았다.






그녀는 엄마의 기억이 없다. 그녀가 사리분별이 가능했을 때, 엄마는 이미 그녀 곁을 떠났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그 빈자리를 채웠다. 그래도 그녀는 언니와 행복했다. 결핍은 두 자매에게 병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처마에 매달린 감에 하얀 분이 내려앉아 곶감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밭에서 딴 야채를 정성스럽게 다듬어 먹는 일상은 행복 그 자체였다. 나는 그 장면들을 읽는 동안 숲과 파도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임랑마을의 어릴 적 기억이 떠올라 눈물과 웃음이 얼굴에 번갈아 번졌다.

그렇게 천진난만한 시간이 소설 중반부터 무너진다. 아버지는 더 이상 그들의 가림막이자 디딤돌 역할을 하지 못한다. 만취된 상태에서 할머니를 구타하고 그것을 먼발치에서 두고만 보았던 소녀는 그 사건 이후로 일상이 무너지고 평생 죄책감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아버지는 사업실패와 술과 노름으로 대학생이 된 자매를 빚더미와 고된 노동의 굴레로 밀어 넣는다.

자매들은 고군분투하지만 그 여정은 자수성가나 새옹지마 같은 말처럼 아름답지 않다. 전교 1등이었던 언니는 공장에서 허리도 펴지 못한 채 일하고 주인공은 김장 김치를 다듬는 주말 알바 같은 노동으로 대학생활을 채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에서 만난 빚쟁이들이 성폭행을 저지르고 태연히 식장에서 밥을 먹고 나가는 장면에서는 울분을 참기 힘들다. 그런 일을 겪은 주인공이 오히려 너무 덤덤하고 태연하게 글을 적고 있어 읽는 사람이 몸 둘 바를 모르게 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만 그들의 달콤한 연애는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쌍둥이를 출산하지만 그녀는 결혼을 할 자신도, 아이를 키울 자신도 없다고 한다. 이미 어린 나이에 삶의 의미가 모두 휘발되어 버린 그녀의 영혼은 그저 쉬고 또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그녀 자신 외에 아무것도 곁에 두고 싶지도, 책임지고 싶지도 않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 남친 집에서 마련해준 남은 빚의 반 정도되는 액수 때문에 출산은 하지만 결혼은 하지 않고 덴이라고 불렀던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아이를 온전히 맡긴다.

그렇게 그녀는 혼자가 되었지만 나아진 것이 없었다. 외로웠고 슬펐고 할머니 무릎처럼 편안하게 누울 수 있는 따스함을 그리워했다. 결국 한강에 몸을 던지려고 했지만 그녀는 결국 주저앉아 울면서 고백한다.

살아야겠다. 아이들이 보고 싶다.

이후 삶이 어떻게 이어질지는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엄마처럼 영원히 아이들 곁을 떠나 있지 않을 것이라 믿어본다. 그리고 누군가를 책임지는 것이 아버지의 노름빚을 갚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 믿어본다. 자신이 선택한 미래와 누군가에게 억지로 떠밀려 뒹굴러 가는 미래는 확연히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 믿어 본다. 그리고 뒹굴다가 어느 순간 멈추면 온 몸에 상처가 생기고 피가 흘러 거울조차 보기가 힘들겠지만, 그때부터 다시 일어서서 나의 미래를 결정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 믿어본다.

이번 겨울에는 흰 눈이 내리면
그녀를 생각하며 술을 한 잔 할 것 같다.


*책을 지원받아 쓴 글입니다.


©️keyp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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