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eypyo Apr 26. 2022

회색빛 같던 삶에 형형색색이 돌아오다

[책] 나목

한국전쟁. 박수근. 그리고 박완서. 미지의 세계가 등불을 밝히고 서서히 다가왔다. 박완서는 1970년에 박수근 유작 전시회를 보고 이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것을 계기로 등단하고 소설가로서 삶을 이어왔다.


박완서의 소설 속에 박수근(옥희도) 알바트로스 같았다. 날개를 다쳐 날아오르지 못한  절뚝거리며 걷는 알바트로스.  자식을 포함해 일곱 식구 먹고살 길을 찾아 북에서 내려와 서울에 정착한다. 그는 스카프에 그림을 그린다. 유엔군이 한국전에 참전해 승기를 잡아가던 때에 미군 PX 그의 직장이었다. 박완서(미스 ) 그와 같은 화가들이 그린 그림으로 미군에게 값을 치르게 하고 정산을 하는 회계를 맡았다. 그녀는  인연으로 박수근을 곁에서   있었다. 그가 세상을 뜨고 치러진 전시회에서 무당이 접신을 하듯 거대한 영감이 몸안에 잉태되어 글을 쏟아내놓아야 하는 운명을 가지게  것이다.



‘목마른 자가 사막에서 신기루나 환각으로 오아시스를 보는 데도 이치가 있을까.’


옥희도는 조화와 균형을 중요시했다. 개인의 성향과 욕망보다는 상호 관계 속에서 피어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눈여겨 보았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몸 안 깊숙이 꿍쳐둔 재능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화가로서의 재능과 숙명. 하지만, 쉽게 붓을 들지 못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무력함. 그는 자신의 그림이 화폭에 얹힐 수 있게 도와줄 뮤즈를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지 못했던 옥희도는 메말라 버린 땅 위 물고기처럼 버둥되었다. 사방이 고요하고 아득해 방향을 잃고 절뚝거리며 걸었다. 그의 발걸음은 무겁고 잦은 멈춤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초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귀태가 있었다.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 선 추상의 세계가 아우라처럼 감싸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운명처럼 회색빛 같던 삶이 미스 리를 통해 형형색색 빛을 찾았을 때, 그는 거친 획으로 그림을 그렸다. 겨우 그린 것이 다 쓰러져 가는 고목이었다.


추운 겨울, 겨우 버티고 버티며 그 수명이 다했는지 아니면 언 땅 밑의 뿌리가 아직 살아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고목이었다. 사람들은 곧 봄이 오면 나무는 죽지 않고 잎을 되찾아 자신의 영광을 보여줄 것이란 미래를 의심치 않는 것 같았다. 그들 또한 그리되리라는 작은 위안을 나무 앞에 심고 밟으며 지나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나무를 썩은 고목이 아니라 봄을 기다리는 나목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렇게 봄이 오자 나무는 꽃이 피었고, 화가는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봄이 오자 전쟁은 끝났고, 사람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살 길을 찾아 헤매었다. 삶은 매번 고통 속을 헤집고 앞으로 나아가는 피난길이었다. 그래도 다시, 봄이 오길 기다리며 우리는 빛과 색을 찍어 발라 희망을 그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슴에 어떤 문장을 품고 계신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