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저주 토끼
문이 열렸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보이는 것 같아서 열린 문안으로 재빨리 들어갔더니 더욱 아득한 먹빛 어둠이 있었다. 나는 주저앉았다.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품을 수 없었다. 산산이 무너질 것 같았다. 땅이 꺼지고 내 영혼까지 모조리 삼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하지 않은 것만큼 그렇게 최악도 아니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스스로 다시 일어섰다. 어쩌면 바닥을 딛었기에 이제는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품을 수 없었던 나로서는 당황스러운 순간이었지만, 애써 부정하지도 않을뿐더러 싫지도 않았다. 그때 다시 열린 문이 보였다. 처음과 달리 이번에는 주춤거렸다.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어둠에 익숙해져 가는 나를 바라보며 안도할 것인가. 무거운 침묵 속에 고민이 깊어졌다. 침묵이 어둠을 물리쳤다. 겨우 걸음을 뗐다. 문 앞에 섰다. 선택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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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작가의 단편집 <저주 토끼>는 낯설다. 변기에서 머리가 올라오기도 하고, 토끼가 모든 것을 갉아먹고, 사람까지 죽인다. 반려 로봇이 주인을 죽이고 도망친다. 배신당한 사랑이 죽자, 그 영혼이 또 다른 고통을 받는다. 맹인 왕자가 눈을 뜨자, 권력과 황금에 눈이 먼다. 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따뜻한 장면에서도 온몸을 묶거나 목을 매달고, 유령을 소환한다. 끔찍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낯선 것에 대한 거북함이다. 거북함을 넘어서면 그 너머 세상이 보인다. 조금은 우습다. 금지된 상상 속에서 현실을 똑바로 보고, 어쩌면 살아갈 용기도 얻을 수 있다는 조언이. 그래도 읽고 숨죽여 곱씹어 본 사람들은 이 말 뜻을 알게 된다. 사람 유형을 나누는 진부한 기준에 이것도 포함시켜야 할지도 모르겠다.
현실을 뛰어넘는 상상은 세상 뒤에 숨겨진 삶을 보여준다. 소재와 주제가 함축하고 있는 것들에 나와 너의 연결고리를 찾고, 세상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다시 자기 자신 앞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지금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저 앞에 있는 문을 열 것인가. 결국 열린 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작가 이야기 | 데모꾼 정보라 작가는 좋아서 쓰다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그러기엔 문학관련 교수도 했기에 전문가다. 한국에서 등단이란 시스템을 거치지 않은 작가가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것에 이목이 쏠리는 듯 하다.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세요.” 인터뷰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