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본가에는 작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강변 공원이 있다. 그곳에는 인공잔디가 깔린 풋살장 두 개가 있다. 원래, 하나만 인공잔디로 되어 있었고, 또 다른 것은 맨땅이었는데 몇 해전부터 둘 다 잔딧빛으로 깔을 맞추어 보기에도 아주 좋다. 옆으로는 태화강이 흐르고 있고, 그 둘레를 따라 십리대밭길이라는 곳으로 길게 이어진 산책로가 있다. 운동 시설이 없는 곳곳에는 유채꽃밭 같은 것들로 조경을 구성해 걷기에 안성맞춤이라 항상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다.
어릴 적 비가 많이 올 때면 강이 불어나 공원이 자취를 감추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존재의 가벼움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비가 그치고 나면 강은 다시 제 모습을 찾았지만, 공원 바닥은 그러지 못했다. 여기저기 쓰레기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심지어 민물고기들이 숨을 헐떡거리면서 몸부림을 치는 경우도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그런 종류의 것들을 바구니에 담기도 했고, 그 틈 사이에서 기관 소속의 조끼를 입은 사람들은 묵묵히 다소 침착한 복구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그런 이들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댐은 1층 가게 안으로 물이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조절할 수 있을까 속으로 그들의 기술력에 감탄하곤 했다.
장마가 끝난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잡것들이 넘어오던 그 공원에서 삼삼오오 모여 풋살이나 족구 등 스포츠라기보다는 체육이 어울릴만한 행위를 한다. 나는 명절이라고 오랜만에 방문한 집 앞 도로변에 차를 대면 그곳에 시선을 둔 채 확인할 무엇이 있는 것 마냥 내린다.
선선한 바람. 갖가지 기합과 소란. 기분 좋은 기운을 맞이하며 그 모든 것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3층 집으로 들어가 가족들과 인사한다. 그것이 명절의 시작이다.
올 추석에는 지상이 큰 고모가 사둔 비눗방울을 들고 그 공원으로 나갔다. 방울이라기보다는 풍선이라고 불러야 어울릴법한 것이었는데, 방울을 만들어 날려 보내기가 생각보다 싶지 않았다. 통을 잡은 손이 비누 거품에 둘러싸였을 때서야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지상이가 신이 나서 뛰어노는 모습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 아내와 지상이 큰 고모는 자리를 깔고 앉아 그 모습을 구경했다. 곧이어 지상이 작은 고모와 고모부가 합류했고, 시장에서 싸온 찹쌀 도넛을 먹으니 가족소풍을 나온 듯했다. 풍선 같은 비눗방울은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날아다녔고 지나가던 동네 꼬마들도 가는 걸음을 멈추고 풋살장으로 들어와 껑충 뛰어 비누 풍선을 따라다니는 것에 정신이 팔렸다. 그만 가자는 부모의 외침은 터지는 풍선처럼 오래가지 못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아이는 그 존재만으로도 좋지만, 과거의 시간이 아이에게 머물 때 나는 다시 새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자주 범람하는 강을 옆에 낀 공원에서 나는 외롭게 혼자서 농구공을 던지곤 했다. 지금은 이렇게 내 아이와 함께 뛰어논다. 공간은 그대로였지만, 잔디도 아이도 그리고 우리 오늘의 시간도 모든 게 새롭다. 자라날 아이가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그 공원처럼 새롭게 단장하고 아이가 뛰어놀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추억이 쌓여 그 아이에게만 있는 기분 좋은 기억의 공간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날, 집안에서 그렇게 뛰어노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명절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마주하며 쉬어가는 시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