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keynote

보물섬을 찾아서

다큐 88/18을 보고

by 랩기표 labkypy

놀라운 영상을 보게 되었다. 우연히 틀게 된 KBS 채널에서 해당 방송국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화면 왼쪽에 적혀 있던 제목은 88/18이었고, 88 서울 올림픽 3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다큐라고 적혀 있었다. 피디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옛 영상들이 순서 없이 흘러나왔다. 찾아보니 독특한 자막은 김기조 디자이너 손에서 나왔고, 음악은 평소에 아주 좋아하고 존경하는 DJ Soulscape 형님께서 맡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선함에 끌렸고 연출, 미술, 음악 3박자가 적절하게 어우러졌다.

이 다큐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여파로 다큐를 제작한 이재웅 피디의 작품들을 더 찾아보게 되었다. 천하장사 만만세, 모던 코리아 시리즈를 보면서 그의 감각과 도전이 내게 시사하는 바가 있어 몇 자 적어 기록해두고자 한다.


즐거운 일을 해야 된다


축구광인 그가 KBS 스포츠국에 입사하면서 다큐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주말 프로그램 중 15분가량 옛날 스포츠 기록 영상을 편집해서 보여주는 코너를 맡으면서부터다. 그 코너를 위해서 KBS가 보유한 방대한 옛 영상자료들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 영상을 보는 것이 너무 재밌었다고 한다. 마치 보물섬에 들어간 기분이었던 것 같다. 영상에 찍힌 사건들로부터 몇십 년이 지나 과거를 바라보는 일은 모든 것을 계획한 신이 인간군상을 보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영상들을 돌려보면서 놀람과 웃음이 가득한 얼굴이 그려진다. 반대로 누군가 시간낭비라고, 귀찮고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후 그는 옛 영상 자료들의 아카이브 다큐를 계획했고 결국 멋진 작품으로 이어졌다. 즐길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일의 대상은 상대적이란 것. 다양한 경험과 기회가 중요하다는 생각.


창작은 조합이다.


많은 정보를 모아 메시지를 결정한 뒤 플롯을 설정하고 스타일을 완성한다.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통해서 시대정신과 나의 정체성을 인지하고 삶의 태도를 완성하는 과정 같다. 그 위에 말투부터 액세서리까지 덧대어 스타일이 완성된다. 이후 나와 어울리는 동료를 찾고 함께 호흡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방법의 정수가 아닐까. 그것이 창작하는 삶의 토대가 아닐까. 나는 이 다큐에서 그것을 다시 한번 더 느꼈다.

그는 이미지만으로 메시지가 충분히 전달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다큐는 자막과 내레이션을 최소화했다. 가요무대, 드라마, 쇼 프로그램, 뉴스, 시사다큐 등으로부터 발췌된 영상들이 재조합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갖고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는 것이 아주 흥미로웠다. 어쩌면 아무렇지 않게 먼지 가득한 창고 구석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과거가 새로운 현재가 되어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작품이 되었다.

결국 내가 살아오면서 그동안 마주쳤던 수많은 경험과 정보들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의 문제로 이어졌다. 결국 발견하지 못했을 뿐,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유무형 존재는 새롭고 다양하게 해석되고 창작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의 진리로 통할 수 있고 그것은 곧 타인에게 공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참 재밌는 꺼리가 많다. 우리가 하나하나 따지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굳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즐기는 자가 승리한다. 새로운 재미를 찾았다는 것. 그로부터 새로운 도전꺼리가 생기고 배운다는 것. 그것만으로 족하다. 다시 나머지 다큐를 마저 봐야겠다.




*아래 영상은 영감 받아 만든 노래를 다큐에 입혀보았습니다.


아니 벌써, 시간이 흘렀나

너는 먼저, 멀리 가버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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