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라는 말을 써 본 적이 없다. 가족을 제외하고는.
연애라고 해봤자 고작 50일 정도였고, 그저 '좋아해' 정도에서 끝난 게 전부였다.
몇 년 전,평생 연애는커녕 썸도 못 타보던 내게, 오랜 지인이 이별 직후의 마음 속 빈 곳을 채우기 위해 내게 고백했다. 연애를 해본 적 없는 나는 당황해서 이것 저것 재보지도 못하고 얼결에 받아버렸지. 그게 내 인생에서 유일한 연애였지만, 그 짧은 기간동안 사랑한다는 말 까지는 차마 꺼낼 기회가 없었다.
타인을 좋아한다는 것이 뭘까?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은 타인을 사랑하고, 그 타인에게서 사랑받는다는 것이 뭘까?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영역이다. 분명 멜로영화를 보면 심장이 뛰고, 달달한 무드를 보면 나도 모르게 설레는 기분을 느끼는 걸 보면 분명 '좋아한다'라는 감정 자체를 모르는 건 아닐 테지만...
이내 그 감정이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는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온 나는 부질없는 꿈을 꾼 것을 민망해하며 눈을 돌린다.
내게는 오타쿠스러운 면모가 있다. 내 친구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난 취미가 많고, 그 취미들 중에는 정말 10년이 넘게 꾸준히 유지해오는 것도 있다. 대가 없이 좋아하고, 그저 그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들이 있다.
비록 그 것들이 사람은 아니지만, 마음을 써서 더 잘해내고 싶고, 더 사랑하고 싶다. 보상 같은 것이 돌아오진 않지만, 그저 취미활동을 하는 그 상황 자체에 놓인 내가 사랑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감정을 모를 수가 없다. 난 누구보다도 천진난만하고 순수하게 어떤 대상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사람이 대상이 되면 얘기가 다르다. 취미는 내가 마음을 아무리 쏟아도 나를 부담스러워 하지 않는다. 열심히 노력하면 노력하는만큼 많은 사랑을 얻을 수 있다. 내가 그 취미를 잘 하게 되는 것이든, 그 취미에 쏟는 만족감이 늘어나는 것이든 간에 노력과 비례해서 사랑이 커져간다는 것을 느낀다. 물론 때때로 권태기가 올 때가 있지만, 그래도 취미는 언제나 같은 곳에서 나를 기다린다.
킥복싱, 캠핑, 요리, 베이킹, 영화, IT덕질까지...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나는 그 취미들을 사랑하고 그 취미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마음을 쏟는 게 두렵다. 내가 어느 선까지 마음을 써야 부담을 느끼지 않을지 그 선을 모른다. 수치가 정량화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사람마다 느끼는 부담감의 역치도 다르다. 그리고 내가 보낸 마음에 대한 피드백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취미는 대가를 바라지 않아도 즐거움이라는 형태로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사람에게 마음을 쏟는 건 아무런 대가도 돌려받지 못할 때가 많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난 열 살 때 쯤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싶었다. 어떤 친구는 나랑 잘 어울릴 수 있는데, 어떤 친구는 날 이유 없이 싫어하곤 했다. 내가 남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었으면 납득이라도 했겠지만, 난 전혀 그런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합리적인 이유 없이 미움을 받는게 너무 마음 아팠다.
그래서 남의 마음을 미리 알고, 내가 그 상대에게 어떻게 하면 잘 보일 수 있을까를 평생토록 고민했던 것 같다.
허나, 35살이 된 지금도 남의 마음은 모른다.
그저 나이 든 아저씨가 말을 걸면 싫어하지는 않을까? 같이 놀자고 하면 사람이 초라해 보일까? 걱정을 하다가 다시 혼자로 돌아간다. 혼자 무언가를 하면 지독하게 외롭고 심심하지만, 거절의 아픔은 받지 않아도 된다.
물론, 그렇게 살면 변하는 게 없다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러나 지금 내 마음은 그저 창호지처럼 얇고 약하다. 손가락에 침 발라서 뚫듯 쉽게 뚫릴 마음인 상태다. 내 마음이 산산이 찢어질까 두렵다. 멋모르고 다가가서 상대가 부담을 느끼게 하는 민폐를 끼치는 것도 싫다.
이런 답보상태가 지속되면 항상 속으로 되묻던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쳐도, 그 사람에게 거절을 당해도 괜찮다고 달려들만큼 좋아하는 마음이라는게 정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걸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허탈해하지 않아도 되고, 대가 없어도 그저 운명이겠거니 받아들일 수 있을 그런 마음이 정말 내게 존재할까?
남을 내가 좋아하고, 나를 누군가 좋아하는 그런 기적적인 일이 과연 가능할까?
내가 죽기 전에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담아 볼 수 있을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