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사람을 좋아한다. 빌어먹게도 사람을 싫어할만한 사건들을 숱하게 겪어왔지만 그럼에도 정에 목말라있고, 사람을 갈구한다. 평생 단 한 번도 살면서 인기가 있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더 그런 걸 수도 있다.
학창 시절에 친구를 만들고 싶어서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을 퍼주다보면, 어느새 호구잡히던가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상대가 부담을 느끼는 관심'은 해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되었다. 내가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무턱대고 잘해주면 안된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좋아서 챙기고, 내가 좋아서 잘해주는 건데도 상대방은 '이거 다 빚일텐데 그만 좀 하지... 겁나 부담스럽네'라고 느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적잖이 충격이었지만, 결국은 납득했다.
마치 식물에게 물을 너무 많이 주게되면 뿌리가 썩어버리듯, 사람에게 주는 관심도 적당량이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가슴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어서 머리로 이해했다.
결국 사람을 좋아함에도 누군가에게 잘해주거나 마음을 쏟는 것을 점점 더 사리기 시작했다. 사람 좋아하는 내 본성을 숨기고, 사무적이고 데면데면한 그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했다. 그게 정답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공식이 요즘들어 많이 깨지고 있다.
물을 너무 줘서 뿌리가 썩을까 봐, 물을 적당량 주면서 관리했더니, 이번에는 인간관계가 시드는 것이다. 잎까지는 잘 자라는데, 꽃이 피질 않았다. '지인'은 생기는데, '친구'나 '연인'은 결코 생기지 않았다.
작년에 살면서 처음으로 썸 비스무리한 것을 경험했었다. 난 혼자만의 생각으로 상황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게 썸이라는 '확신'은 없다. 그 쪽은 나를 그저 지인 중 하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니까.
다만, 둘이서 주말을 보내고, 영화도 보고 했으니 그런 관계이지 않았을까 유추해볼 뿐이다.
아무튼 그 관계는 내게는 나쁘지 않은 징조라고 여겨졌고, 더 가까워져보려고 용기를 내서 더 가까운 관계로 발전해보자고 얘기를 했었다. '나는 당신과 있는 시간이 즐거운데, 더 알아가보면 어떻겠냐'는 상투적이면서도 조심스러운 접근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몰랐단다. 매 주말마다 만나면서 이게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가 가진 않았다. 나를 그저 심심한 주말을 보내기에 적당한 친구로 여겼던 것이었을까?
아무튼, 부담을 주지 않으려 물을 정량만 줬더니, 잎까지는 자라났지만, 꽃이 필만큼 충분하지는 않았나보다.
뿐만 아니라, 내가 사람을 조금이라도 사귀어보기 위해서 다니는 모임에서도 비스무리한 일들이 일어난다. 오랫동안 그 곳에 속해있었음에도 나를 제외한 모두가 친해져있다. 그들과의 친분은 도통 깊어지지 않고, 그들은 나를 빼고 서로 호형호제하며 순식간에 베스트프렌드로 거듭났다.
난 그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적당한 거리감의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누구도 크게 싫어하지 않지만, 누구도 친한 친구로 여기지는 않는, 그저 평범한 거리의 적당한 지인.
물을 많이 주면 뿌리는 썩는다.
물을 적게 주면 꽃은 피지 않는다.
어떤 화초도 썩게 만들지 않았다면, 그건 식물을 잘 키운 것일까? 아니면 꽃 한 송이 피워내지 못했으니 실패한 것일까?
차라리 부담 주며 다가가서 내 사람을 만들었어야 했을까? 아니 그게 가능하긴 한 걸까?
내 오랜 친구들은 나를 응원해주며 용기를 내라고 한다. 그들은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땐, 부담 팍팍 주며 다가가도 괜찮다고 위로한다. 그래서 떠나면 인연이 아닌 거니까 신경쓰지 말라고들 한다.
...그런데, 난 꽃을 못 피워내는 것보다 뿌리를 썩히는게 아직은 두렵다.
이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나는 늙어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