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명함 없이 나를 소개할 수 있나요?
그리스 테살로니키 공항.
12년 차 패션 디자이너 시절, 저는 이곳에 자주 왔습니다. 회사의 주요 주얼리 제작사가 있는 도시였죠. 전 42개국에 진출한 글로벌 럭셔리 패션 회사의 5개 디자인팀의 수석 디자이너였어요. 스페인에서도 럭셔리 브랜드로 대표적인 브랜드인 CH Carolina Herrera와 Purificación Garcia 브랜드를 맡고 있었습니다.
일 년에 4번씩 새 시즌 컬렉션을 기획할 때마다 트렌드 분석, 상품 구성 및 디자인 기획, 프로토타입 선별, 프로덕션 샘플 확인, 등의 작업을 꾸준히 해왔어요. 테살로니키에 위치한 제조업체는 스페셜 컬렉션 및 실버 주얼리 제품들을 만들었던 곳입니다.
공항에 도착하면 검은색 벤츠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줄리 님, 오랜만입니다!"
CEO가 직접 나와 호텔까지 모셔다 주곤 했죠.
다음 날 아침, 회사 미팅.
"택시 타고 가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직접 모시러 가겠습니다."
회의실에 들어서면, 테이블 위에는 헤렌드(Herend) 포르셀린 커피잔이 놓여 있었습니다. 헝가리 왕실 납품 도자기 브랜드죠.
"특별히 준비한 원두로 직접 내렸습니다."
향긋한 아라비카 원두 향이 회의실을 가득 채웠습니다.
저녁에는 테살로니키에서 가장 핫한 레스토랑으로 초대를 받았죠. 3개월 전부터 예약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줄리 님과의 미팅을 위해 미리 예약해 뒀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저는 회사를 그만두고 제 브랜드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테살로니키를 찾았죠. 같은 제작사, 같은 CEO에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답장은 한 줄이었습니다.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공항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택시를 타고 회사를 찾아갔죠. 미팅 당일, 회의실 테이블 위에는 일회용 종이컵에 텁텁한 인스턴트커피가 담겨 있었습니다. 미팅은 1시간 30분 만에 끝났습니다.
"샘플 오더 보내주시면 검토하겠습니다. 잘 가세요."
택시 뒷좌석에 몸을 기댔습니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테살로니키 거리를 보며 생각했죠.
'이게 현실이구나. 명함 뒤에 숨은 진짜 세상.'
조금 서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하게 오기가 생겼습니다.
'좋아. 이제 내가 직접 만들어야지. 내 이름으로, 내 브랜드로 다시 여기 오겠어.'
3년 후.
Arium Collection이 싱가포르 럭셔리 백화점 8곳에 입점했을 때, 그 CEO에게서 이메일이 왔습니다.
"줄리 대표님, 축하합니다. 다음에 테살로니키 오시면 꼭 연락 주세요. 특별히 준비하고 싶습니다."
저는 웃으며 답장을 보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인스턴트커피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커피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만들 가치니까요."
그때의 종이컵에 담긴 인스턴트커피든 고급 커피잔에 담긴 고급 원두든 이젠 정말 상관없어졌거든요. 제가 디자인 한 상품을 가장 세심하고 전문적으로 민들나 준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니까요.
이 경험은 제게 냉혹한 진실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디자인을 제조해 주던 회사는 저를 대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뒤에 있는 '회사의 힘'을 대접한 것이었죠. 한국 사회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느 회사 다니세요?"
"직급이 어떻게 되세요?"
서로에게 끊임없이 묻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타인의 기준으로 나를 정의하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그 명함 뒤에 진짜 '나'는 없었습니다. 40대에 창업을 결심했다면, 가장 먼저 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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