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살았다는 증거
"그냥 다 멈추고 한 달만 쉬고 싶어요."
"출근할 생각만 하면 한숨이 납니다."
"다 때려치우고 싶어요."
직장에서 일만 하면 좋을 테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직장에서의 인간관계에 지친 우리는 너무 많은 피로를 겪으며 살고 있다. 좁은 지하철에 매일 출근을 하는 것만으로도 하루 직장 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지친다. 좁은 사무실에 무수히 다양한 잣대에 시도 때도 없이 맞추고 원치 않은 관계에 노출되는 것도 모자라 사내 소음과 눈치에 시달린다. 매일 '피곤하다', '지쳤다' 외치지만 경쟁을 부추기는 과잉 활동 사회에서 나만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도 타인과 공존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는 에너지가 바닥이 나버린다.
최근 한 벼룩시장구인구직 설문조사 (2020년 7월)에서 직장인이 스트레스를 받는 가장 큰 원인으로 업무량과 낮은 연봉을 제치고 '인간관계'가 1위로 선정됐다. 매일 반복되는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번아웃은 직장인에게 언젠가는 꼭 찾아온다.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이란, 미국의 심리학자 허버트 프로이덴 버거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탈진 증후군으로 불리기도 한다. 어떤 일에 과도하게 몰두하다가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계속 누적되어 무기력증이나 불안감, 우울감, 분노, 의욕상실 등의 증상이 생기는 것을 뜻한다.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는 슬럼프에 빠지는 현상이 장기적으로 악화한 상태다. 번아웃은 내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고갈되어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시달리는 직장인이 흔히 겪는 증상이며 휴대전화가 방전되는 것과 같다. 한국인의 연간 근로시간은 2113시간으로 OECD회원국 중 2위다. OECD 평균 근로시간인 1766시간과 비교하면 1년에 약 347시간을 더 일하는 것이다. 한국 직장인 중 85%가 번아웃을 경험했다고 답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다.
보통 번아웃은 피로가 쌓여 에너지가 방전돼 충전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Burn out' 자체의 의미로만 봐도 번아웃은 방전된 상태가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맘 자체가 과열로 타버린 상태를 말한다. 충전 자체를 할 수 없는 상태다. 때론 주변 사람들은 '너 그렇게 일한다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어'라며 위로인지 욕인지 헷갈리는 말을 해준다. 적장 본인도 미친 듯이 일을 하면서 말이다. 번아웃은 2019년 5월 WHO (세계보건기구)에서는 ICD-11에 정식으로 등록해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만성적 직장 스트레스에서 오는 증후군'이라고 정의했다. 의학적인 질병에는 포함 시키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알고 관리해야 하는 직업 관련 증상 중 하나라고 분류했다. 반면 유럽에서는 번아웃 증후군을 질병으로 분류했다. 우리가 가볍게 여길 증상이 아니라는 의미다. 번아웃 증후군은 우울증과 다르다. 우울증은 우울한 감정이 과도하게 작동하지만, 감정은 살아있다. 반면 번아웃 증후군은 감정이 사라진 무감동 상태다. 너무 하얗게 내 몸을 불태운 것이다.
미국 초고 의료기관 중 하나인 메이요클리닉은 번아웃 증후군이 잘 생기는 사람을 6가지로 분류했다.
1. 직장 생활과 사생활의 균형이 깨진 사람
2. 업무량이 많아 야근이나 추가 근무가 필요한 사람
3. 모든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서 하는 사람
4. 의료진처럼 다른 사람을 돕는 직업을 가진 사람
5. 업무를 거의 또는 전혀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
6. 일이 단조로운 사람
많은 사람이 내게 활달하고 긍정적인 성격에 자기관리가 확실해서 스트레스를 받지도 번아웃을 겪지 않겠다고 얘기한다. 아니다. 나 역시 번아웃을 여러 번 겪었다. 평소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고민거리가 전혀 없는 게 아니다. 긍정적인 사람은 고민거리가 있어도 스트레스를 부정적인 사람보다 덜 받을 뿐이다. 그런데 몸과 마음이 지치면 누구나 부정적인 면을 보게 된다. 긍정적인 사람도 번아웃 증후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내가 한국 사람들에게 들은 번아웃의 가장 큰 원인제공은 직장 문제였다. 하루에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내기때문에 불가피한 상황일테다. 업무에 대한 자신의 권한이 불분명할 때, 상사가 자신의 성과를 과소평가할 때, 직장이나 사생활에서 소외감을 느낄 때 찾아오는 것이 번아웃 증후군이다. 시간은 제한적인데 일이 너무 많아 자기조절능력을 잃게 된다. 매시간 끊임없이 쏟아지는 방대한 일에 자신이 통제하지 못할 상태에 이르게 된다. 어느 순간 일하는 기계라는 생각이 든다. 과도한 작업량과 동시에 팀워크를 중시하다 보면 여러 업무를 동시다발적으로 해야 한다. 멀티플레이어로 하다 보면 결국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를 상태까지 이르게 된다.
내가 번아웃 증후군의 겪으며 느꼈던 3가지 초기 증상을 요약해보면 의욕, 성취감, 공감력 저하다. 일 할 의욕이 없어 동기부여가 잘 안 된다. 어떤 목표를 달성해도 노력에 대한 성취감을 잘 못 느낀다. 공감은 남을 위로하고 남에게 위로받는 능력인데 번아웃 증후군을 겪는다면 상대방에게 따뜻한 감성을 주는 것을 고사하고 받는 것조차 안되는 마음 상태가 돼버린다. 본의 아니게 까칠한 성격이 나오면서 대인관계에도 문제가 생긴다. 직장뿐만 아니라 개인 인간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배가 불러도 허기가 지는 느낌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번아웃 증후군을 겪으며 1차적으로 심리적인 문제가 신체적인 병으로 전이가 된다. 우리가 허기를 느끼는 원인의 절반 이상이 정서적 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외로움과 정서적 허기 때문에 폭식하게 된다. 반면 나 같이 정반대로 나타나는 예도 있다. 식욕이 완전히 떨어져서 입이 짧아진다.
2차 적으로 '다 때려치우고 싶다'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심리적 회피 반응'이라고 하는 심리는 평소 긍정적인 사람도 부정적인 생각이 강해져 스트레스 원인에서 멀어지고 싶다. 윤대현 교수는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것과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동전의 앞뒤처럼 한 객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연한 여자는 남자를 멀리함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그 기간이 길어지면 이성으로부터 받는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장기간의 회피는 결국 행복과의 결렬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3차적으로 나타난 증상은 현실 회피 기간이 길어지면서 생기는 '무감동'이다. 나를 찔러대는 정보와 자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감성 예민도를 0으로 떨어뜨린다. 따뜻한 위로와 작은 행복도 느끼기 어렵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보면 번아웃 증후군은 삶에 대한 비관적인 태도를 키우는 아찔한 문제다.
취미가 뭐에요 ?
번아웃으로 괴로워하시는 분들에게 내가 질문이다. 뚱딴지같이 취미가 뭐냐고 물어보는 이유는 '일 말고 열중할 수 있는 무엇'이 가장 적합한 처방전이기 때문이다. 번아웃에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 삶의 기대치가 낮아진 경우, 회사에서 내 맘대로 안되는 경우 기대치를 낮추거나 시선을 '만족'할 수 있는 다른 무언가에 옮기면 행복의 기대치가 향상된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일 말고 내가 좋아하고 만족할 수 있는 다른 무언가에 집중함으로써 번아웃 증후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번아웃 치료법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포기'와 '마음 충전'이다. 여기서 포기란 애타는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얘기다. 바꿀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마음을 접으라는 의미에서 '포기'다. 번아웃이 왔다면 다섯가지를 시도해보라고 제안한다.
운동
개인적으로 운동이 가장 도움이 되었다.
1주일에 1시간씩 3~4번 시간을 만들어서 꾸준히 운동했다. 주말에는 산책하면서 아무런 생각도 하려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 발검음을 느끼고, 바람을 느끼며 일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휴식기
번아웃 증후군을 호소하는 사람은 일을 그만두고 조용한 곳에서 1년 정도 푹 쉬고 싶어라 한다. 특히 모자랐던 잠을 충분히 자 줘야 한다. 주말에 몰아 잔다고 나아지지 않는다. 규칙적으로 6~8시간을 자 줘야 한다. 가능한 상황이라면 퇴직보다는 1년 휴직을 하길 권장한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면 회사와 개인의 삶을 철저히 분리하는 태도를 키워야 한다.
삶의 균형
인생을 잘못 산 것이 아니다. 그저 일과 삶의 균형이 무너진 것이 문제다. 일은 정해진 업무 시간에 마치고 퇴근 후에는 절대로 집으로 일을 가져가지 않는 것이 좋다. 퇴근 후에는 오롯이 자기 자신을 위한 생활을 즐겨야 한다. 운동, 요가, 명상 등 일을 잊을 수 있는 행동을 취해줘서 스트레스를 제거해주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짧은 여행
주말에 가까운 곳으로의 짧은 여행을 계획해 보는 것도 좋다. 등산같이 자연을 걷는 것이 마음을 다스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먼 곳으로 가는 것보다 가까운 곳, 조용한 곳을 찾는 게 피로감을 줄이고 유리하다.
버킷리스트작성
언젠가는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당장 이루기는 힘들더라도 하고 싶은 마음을 꺼내놓는 것 만으로도 묘하게 마음이 살랑거린다.
10개국에 살면서 각양각색의 번아웃을 경험했다. 끊임없이 맺어야 하는 직장 인관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힘들다. 하지만 번아웃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번아웃을 예방하는 것이다. 내가 터득한 감정의 번아웃 예방법은 내가 17년 동안의 사람에게 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나를 지키기 위해 만든 예방법'이다. 세 단계를 거친다.
첫째는 나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내가 그 날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이해하고 안아주는 것이다. 힘들었던 마음, 괴로움, 속상함, 억울함, 초초함 그 모든 감정을 그저 바라보고 토닥여줬다. '오늘 많이 속상한 날이구나. 그래도 괜찮아.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라고 수용해줬다. 나를 이해해 주는 애틋한 마음 하나만으로도 다음날 나는 상처가 많이 아물어있었다. 여기서 정말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지'라고 자책하지 않아야 한다. 복잡한 생각이나 되새김질로 시간을 채우지 말자. 나를 미치게 만드는 그 사람을 위한 일이다.
두 번째로 직장 경계선을 넘어서 내 인생까지 영향을 주고 망치고 있거나 망칠 가능성이 있는 사람 리스트를 적는다. 나는 이를 '에너지 드라큘라 리스트'라 불렀다. 나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가장 많이 뽑아가는 드라큘라같은 사람들 순서대로 배열한다. 각각의 드라큘라 들의 장단점을 적어 내려간다. 장점을 찾아내기 힘들지만 '그래도 이건 그나마 낮지' 할만한 것들을 적는다. 최대한 자세하게 적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이 나를 그토록 힘들게 만드는지 파악하기 위함이다. 스트레스를 견뎌 낼 힘, '회복력'은 에너지 드라큘라들이 하는 행동이나 말을 향해 내 마음에 빨강 딱지를 붙임으로써 시작되었다. 조심하라는 경고를 마음에 담아놔야 또라이 행동에 자비로울 수 있다. 알고 당하는 것과 모르고 당하는 것은 방어기제를 세우는 데 큰 차이가 있다.
셋째는 '멘탈 안전 사전거리'를 지정한다. 에너지 드라큘라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을 향한 내 안전거리 정도를 세우는 것이다. 회복력을 높이기 위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변수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를 구분했다. '또라이'의 막말과 행동, 고객의 갑질, 코로나19의 엄습 등 외부적인 스트레스는 자신의 노력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는 통제할 수 없는 변수다. 이 변수는 나라마다 또 회사마다 천차만별로 다르다. 직업문화의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범주는 내가 바꿀 수 없다.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나'에게 다시 집중한다. 그리곤 '멘탈 안전 사전거리'를 지정한다. 어느 만큼의 거리를 유지해야 내가 다치지 않을지 정하는 것이다. 혹 '또라이'님들이 내 세상에 발을 들일 때 방법은 두 가지다. 현명하게 피하거나 대놓고 싸우거나. 싸우는 것은 너무나 에너지 소진이 많아 현명하게 피하는 방법을 선호한다. 그리고 한 발자국 뒤로 나와 연민의 눈으로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봐주는 힘을 길렀다. '다를'뿐이지 '틀렸다'라고 되뇐다.
이 방법이 먹히지 않을 경우는 최소한의 교류를 하며 다른 부서로 옮기거나 회사를 옮기는 준비 작업을 시작한다.
"꼰대 상사와 고객의 갑질, 직장 내 억울한 뒷담화, 과도한 업무와 야근,
쥐꼬리만 한 월급 등 이런 악조건에서도 도망치지 않는 내가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존중 받아 마땅하다."
<우린 좀 지쳤다: 번아웃 심리학> 본문 중
오늘도 우리는 출근을 한다.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하는 그 숭고한 행위에 당신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그 존중은 자기 자신이 먼저 해줘야 한다.
오늘도 출근하는 당신의 거룩한 용기에 열렬한 환호와 갈채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