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려진 건 많은데 내가 먹을 수 있는 건 어디에
희미한 줄이 나타났다. 그 옛날 매직아이를 할 때처럼 눈을 게슴츠레 뜨고 봐야 언뜻 보이는 분홍색 줄. 사진으로 찍어서 밝기 조정을 조금 하면 언뜻 보일까 싶은 그런 희미한 줄.
결혼식 전부터 준비해 왔던 임신이었다. 둘이 함께 영양제를 먹고, 운동을 하고, 미래 계획을 했다. 너무나도 희미한 그 두 줄을 처음 보았고, 들뜨고 설레는 것보다도 불안과 불쾌함이 먼저 몰려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호르몬 탓이었다. 임신테스트기 줄이 흐릿하면 유산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도, 근 한 달간 보였던 이상한 식욕도.
그리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식욕도. 다 임신 호르몬 탓이었다.
식욕은 내 인생의 전부였다. 사람에게는 많은 욕구가 있지만, 내 안에 있는 대부분의 욕구는 곧 식욕이었다.
열여덟 살 무렵, 가장 심했었던 내 식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먹을 수 있어?'라 말하며 기함하곤 했다. 새벽 5시에 기상하여 눈 뜨자마자 곰국에 쌀밥 한 그릇 말아먹고, 1시간 30분 가까이 되는 통학시간 동안 자다가 안양에 도착할 무렵 한솥도시락에 전화를 걸어서 치킨마요 곱빼기를 예약해 두고, 아침 등굣길에 묵직한 치킨마요 도시락을 들고 가서는 자습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먹는다. 2교시 수업이 끝나는 쉬는 시간에 매점으로 달려가서 피자빵 하나랑 미닛메이드 주스를 마셨다. 그러고 점심시간이 되면 배식당번을 자처하여 배식을 하고 맨 마지막에는 식판 두 개에 밥과 반찬을 가득 채워서 먹었다. 7교시 수업이 끝나고 나면 집에 가는 길에 친구들과 외식을 하고는 했는데, 보통 스파게티를 먹거나(때로는 크림 스파게티랑 토마토 스파게티를 두 개 다 시켜서 먹을 때도 있었다), 안양역 롯데 백화점 지하매장에서 파는 음식들을 사서 먹고는 했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족들이랑 식사를 했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밤새 과제를 하며 야식을 먹을 때도 있었다. 하루에 7~8끼를 고칼로리로 채웠다. 그때 나는 침대에 눕기만 해도 모든 신경이 다 눌려서 온몸이 저릴 정도로 거대해져 있었고, 생리를 거의 한 적도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저를 놓은 적이 없었다. 이 당시 나는 정말 끔찍할 정도의 식욕을 가진 사람이었다.
식욕의 노예라 함은 아무 가림 없이 먹을 수 있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내 식욕에는 끝이 없었다. 집에 정말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물을 끓여서 다시다 가루를 넣은 다음 밥을 말아먹기까지 했었다. 도대체 그 굶주림과 식욕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생각할 틈이 없었다. 나는 그냥 그렇게 평생 먹으며 살아왔다.
몸무게 세 자릿수를 앞두었던 열아홉 살 무렵, 연극영화과 친구가 내 머리채를 잡고 끌고 나가 이대로 가면 죽게 생겼다면서 다이어트를 시키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하루 세끼만 먹었는데도 살이 20킬로 가까이 빠졌었다. 보통 청소년기의 식욕이 왕성하다고 하지만, 내 식욕은 이리 유별났었다.
아무리 다이어트를 하고, 건강을 챙긴다 하더라도 평생 함께해 온 식욕이 어디 가겠느냐. 나이가 들면서 조금 주춤하긴 했지만 식욕을 참는데 능숙해진 것일 뿐, 내 식욕은 건재했다. 결혼식을 준비할 때도, 임신을 준비하면서도 나는 그 식욕을 못 눌러 다이어트에 성공하지 못했었다. 내 몸무게는 언제나 비슷했고, 식욕은 약을 먹어도 뭔 짓을 해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그러던 내가 임신을 했고, 나와 평생 함께해 온 식욕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광어회가 먹고 싶다고 울부짖고 있었는데,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식욕이 싹 사라져 버렸다. 모든 좋은 냄새들이 역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평소에 몸에 바르던 화장품, 애용하던 샴푸와 바디워시, 집 안 곳곳에 있던 방향제까지. 나는 모든 향기가 나는 물건들을 서랍과 장롱 깊숙이 넣어버렸다. 바로 어제까지 마셨던 커피 향기에도 구역질이 올라왔다. 심지어는 그냥 쌀밥이랑 생수에서도 비린내가 올라와 아무것도 입에 넣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언제나 아무거나 잘 먹던 애였는데, 한 순간에 아무것도 못 먹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한 순간에 능력을 잃어버린 히어로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절망적이었다. 다시는 음식을 맛있게 먹지 못할 것이라는 극단적인 생각만 들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몸은 나른하면서도 무겁고, 아무것도 먹지 못해 힘이 나지 않았지만 어른인 나는 가만히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다. 설날이 바로 코 앞이었을 때였다. 양가 어른들이 내게 시키는 일은 거의 없지만 딸로서 장보기를 돕거나 며느리로서 아침 차례에는 참석해야 하지 않겠는가. 머릿속에 그 희미한 두 줄이 계속 어른거렸다. 남편과 나는 안정기가 될 때까지 가족들에게는 임신 이야기를 하지 말자고 하였다.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말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뭘 먹어보려고 노력을 했다. 이제는 홀몸이 아니니까. 그냥 내 몸 하나 아픈 거면 굶으면서 누워있어도 되지만, 배 속에 아기가 있는 이상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뭐라도 먹어야만 하는데, 먹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이 시기 내 기억에 남는 가장 힘들었던 일 두 가지는 친정 식구들과 장을 보러 가는 것과 시댁에 가서 차례상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시장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장소였다. 시골 똥강아지들이 가득한 동네 5일장,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아파트 단지에서 열리는 야시장,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동네 재래시장까지. 가끔 위생이나 바가지 때문에 시장이 싫다 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나는 그래도 시장이 좋았다. 약한 결벽증이 있던 나였지만 파리가 살짝 앉았다 간 핫도그도 시장에서라면 먹을 수 있었다. 좌판에서 상인들과 나누는 소소한 이야기들도 좋았고, 덤으로 사과 한 알이나 감자 한 알 챙겨주는 그 정도 좋았다. 무질서하게 음식들이 거리에 잔뜩 놓여있는 그 모습을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괜히 살 것도 없으면서 시장을 둘러다니다가 지갑을 여는 일도 허다했다.
식욕이 아닌 호르몬의 노예인 내게 시장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친정 엄마는 나를 끌고 시장 곳곳을 다니면서 전부 다 맛있어 보이지 않냐면서 내게 골뱅이 시식을 권하고, 저녁으로 뭘 먹을까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굳이 찾아다니셨다. 명절을 앞둔 시장에는 한 걸음 내딛기 힘들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한겨울이었지만 나는 사람들의 몸에서 나는 땀냄새와 머리에서 나는 기름냄새까지 느껴져 속이 울렁거렸고, 내가 좋아할 거라면서 엄마가 산 족발과 골뱅이 냄새에 역하다 못해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 보면 참 둔한 가족들이었다. 저번주에는 광어회를 일주일 동안 세 번이나 먹겠다던 딸이 오늘 갑자기 식음을 전폐하고 속이 메슥거리다면 한 번쯤은 의심해 볼 법도 한데 말이다. 평소 워낙 먹는 것을 좋아하고, 잘 먹는 딸이 아무것도 못 먹겠다면서 갑자기 체했다는 뻔한 거짓말을 치는데도 우리 가족은 아무것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손주 빨리 보고 싶다고, 꿈이 좋다고, 뭐만 하면 임신 아니냐고 맨날 설레발치던 가족들이 티 나게 입덧을 하는 딸내미를 앞에 두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모습이라니. 임신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어서 입이 간지러웠다. 생각해 보면 엄마랑 아빠가 나를 너무 믿어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가족들에게 거짓말을 해본 적 없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달려와서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던 그런 딸이었으니까. 임신이라는 큰 일을 겪었으면 분명 자신들에게 제일 먼저 와서 말하겠지 라는 믿음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설날 아침, 시댁에 가면서도 걱정이 많았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빈속에 차까지 타고 가려니 속이 더 울렁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행여 차례상 앞에서 신물이라도 토해내면 어쩌지, 뭐라 말해야 할까. 아침에 다시 해본 임신테스트기의 두 줄은 더 뚜렷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산부인과에 가기 전이라 임신을 확신하기 어려웠다. 나와 남편은 자궁 외 임신이나 유산 같은 상황을 상상하며 불안해하면서 행여 부모님이 의심을 하면 뭐라 변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부터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조기냄새가 났다. 세상에 나는 이런 역한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었다. 음식물 쓰레기통에 머리를 처박으면 이런 느낌일까. 집 안 가득히 나는 조기냄새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다. 그냥 그때 아집을 부리지 말고 엉엉 울면서 임신이라고 말이라도 할걸. 나는 왜 그렇게 미련하게 버텼던 것일까.
차례상 앞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남편이 오랜 연애 끝에, 돈도 하나 안 모아 두고도 아무 문제 없이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우리 두 집안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나이도, 혈액형도, 고향도 같으신 부모님들. 정치적 성향까지 같은 가족들은 사이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결혼 과정 속에 흔히 일어나는 사돈 간의 마찰도 우리 집에서는 전혀 없었다. 가게 사람들이 상견례 자리를 가족모임으로 착각했을 정도로 화목했다. 그런 우리 두 집안의 차례상과 명절문화는 데칼코마니처럼 닮아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우리에게 제사의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 했지만, 나와 남편은 먼저 나서서 예의를 차리려던 이들이었다.
내게 차례상은 딱딱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전과 산적, 나물과 탕국, 문어와 생선, 흠이 없고 신선한 과일들. 평소에는 손이 많이 가서 잘 안 만들거나 비싸서 사 먹지 못하던 음식들이 한 상에 가득 차려져 있다. 시장 음식들에는 무질서하게 차려져 있는데서 오는 멋이 있었더라면, 차례상에는 집안의 비법이 가득 담긴 정성스럽고 아름다운 음식들이 질서 정연하게 차려져 있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차려진 것이 많은 이 풍요로움을 나는 사랑했었다.
그 풍요로운 음식들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음식을 맛보지는 못할 망정 차례상 앞에서 토를 하거나 쓰러진다? 그때 당시 나는 그런 불상사를 어떻게 서든 피하고 싶었다.
또다시 나는 체했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설날 차례상 앞에 앉아있었다. 그런 나의 이상함을 알아챈 것은 어머님도 아닌, 아버님이었다. 안절부절못하면서 내 앞에 과일들을 가져다주며 이거라도 좀 먹어보라고 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평소에 물보다도 많이 마시던 커피를 안 마시겠다는 내 모습을 보면서 아버님은 눈치를 채셨나 보다. 평소엔 주시지도 않던 술잔을 내밀면서 음복을 하라고 권하시지를 않나, 조기를 좋아하지 않았냐면서 내 앞에 조기를 가져다 두고 사색이 되는 내 표정을 보며 아버님은 확신을 하셨다고 한다. 우리 둘이 집에 돌아가고 나서는 신이 나셔서는 어머님에게 며느리가 임신을 한 것 같다며, 예전에 입덧을 하던 어머님의 모습이랑 똑같다면서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처음으로 입덧을 하면서 맞이한 명절날, 나는 풍요로운 음식들의 향연 속에서 다시는 내가 그 음식들을 먹지 못하게 될 것 같아서 많이도 슬퍼했다. 이 슬픔과 절망은 임신 기간 내내 이어졌다. 그렇게 먹을 것을 좋아하다 못해 사랑하던 내가 9개월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입덧을 하며 식욕을 잃게될 줄이야. 이 때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더 큰 변화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